(30)등 떠밀려 출마 강요…다선 의원의 비애
결단으로 험지 출마는 정치적 도약의 계기
선거 결과에 따라 좌우되는 정치적 생명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0일 YTN 라디오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전한 말이다. 국민의힘 일각에서 하태경 의원 수도권 차출론이 나오자 자기 지역구인 부산 해운대구를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셈이다.
하태경 의원은 2012년, 2016년, 2020년 등 최근 세 번의 총선에서 내리 당선된 부산 해운대구의 터줏대감이다. 해운대는 부산에서도 국민의힘 지지세가 강한 지역, 이른바 밭이 괜찮은 곳이다.
친윤(친윤석열계)으로 분류되지 않는 하태경 의원 지역구에는 윤석열 대통령 신임이 두터운 인사를 비롯해 복수의 인사가 공천을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국민의힘 해운대 지역구 후보가 바뀔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하태경 의원은 그동안 선거를 통해 자기 경쟁력을 입증했지만, 그 결과는 개인기보다는 당 지지세가 반영된 것이라는 내년 총선 교체론의 배경이다.
하태경 의원이 아니라 누가 나와도 ‘해운대=국민의힘 당선’ 등식이 형성된다는 인식은 근거가 있을까. 하태경 의원의 해운대 공천 여부는 국민의힘 총선 흐름을 좌우할 변수 중 하나다. 총선 내홍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른바 ‘수도권 차출론’을 비롯한 험지출마 바람은 역대 총선 때마다 반복된 장면이라는 점이다.
당내 비주류 인사의 자리를 뺏고자 당세가 약한 지역으로 출마를 권유하는 흐름도 있고, 해당 정치인의 정치적 소신과 포부에 따라 자기 지역을 떠나 험지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자기 지역구에서 공천받을 확률이 떨어진다는 점을 인지한 뒤 전략적 선택으로 험지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있다.
험지는 당세가 상대적으로 약한 지역, 당선될 경우 소속 정당에 큰 선물을 안겨주는 그런 지역을 말한다. 어려운 지역인데 정치인의 개인기를 토대로 당선된다면 승리의 의미가 배가된다는 얘기다.
험지가 아닌데 정치적 효과를 상승하고자 험지출마인 것처럼 포장하는 경우도 있다. 정치권 사정에 밝은 이들이 보면 기가 차는 상황인데 일반인들은 해당 지역구 사정을 세세하게 알지 못하니 ‘정치인 눈속임’에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역대 총선 그리고 재·보궐 선거를 포함해 험지출마의 주체를 꼽는다면 주요 정당의 정치 지도자급 인사들이 주축이다. 해당 지역에서 선수를 하나 더 쌓는 것보다 정치적인 상징성이 큰 곳에서의 당선이 자기 상품성을 극대화하는 방안이라는 걸 인식한 결과다.
영남에 지역구를 둔 의원이 호남 지역에 출마하거나 호남에 지역구를 둔 의원이(정치인이) 영남에 출마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낙선을 벗어나기 어려운 곳, 험지보다는 사지(死地)에 가까운 곳에 도전하는 것은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남에 정치적 기반을 둔 정당의 정치인이 호남 지역구에 출마하거나 호남에 정치적 기반을 둔 정당의 정치인이 영남 지역구에 출마한 경우는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르는 동교동계 인사로 분류되는 정치인 김태랑은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전국구 국회의원 자리를 승계받아 원내에 진출했다. 국회의원 자격을 이어가려면 새정치국민회의 강세 지역인 호남이나 서울 등에 출마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경남을 선택했다.
동교동계 출신의 경남 밀양·창녕 총선 도전. 결과는 어땠을까. 결과는 26.6% 득표율로 낙선이었다. 경쟁 후보였던 한나라당 김용갑 후보는 54.7%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됐다. 김태랑 후보도 험지에서 선전했지만, 당선과는 거리가 먼 득표율이었다.
전남 담양·곡성·장성·구례 등의 지역에서 3선을 했던 김효석 전 의원의 2012년 제19대 총선 서울 강서구을 도전도 기억할 만한 장면이다.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그는 당선이 사실상 보장됐던 전남을 떠나 서울에 도전장을 냈다.
정치인 김효석은 49.6%의 득표율을 올리며 상당히 선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상대는 강서구을 현역 의원이었던 정치인 김성태였다. 김성태 새누리당 후보는 50.4% 득표율을 기록하며 자기 지역구를 수성했다.
지역 기반이 탄탄하고 인지도도 높은 현역 의원을 상대로 다른 곳에서 온 정치인이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남이나 호남에서 다선을 쌓더라도 서울에 오면 정치 기반이 미약한 것은 정치신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총선을 넘어 재·보궐선거로 대상을 넓힌다면 2011년 4·27 재·보궐선거의 경기 성남시 분당을 선거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정치인 손학규는 당의 험지였던 분당에 도전했다.
한나라당 역시 대표를 지냈던 정치인 강재섭으로 맞불을 놓았다. 대구·경북(TK) 맹주로 불리던 정치 거물 강재섭의 분당 도전도 그 자체로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였다. 분당은 한나라당 강세 지역이지만 대구를 떠나 수도권으로 넘어온 것 자체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당선된다면 명실상부한 중앙 정치인으로 우뚝 설 수 있지만, 낙선한다면 정치적인 생명을 위협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분당을 재보선에서는 손학규 민주당 후보가 51.0% 득표율을 올리며 당선됐다. 강재섭 한나라당 후보도 48.3%를 올리며 선전했지만, 낙선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여야 모두 정치 리스크를 짊어졌던 분당을 선거는 정치사에 교훈을 남긴 대결이었다.
승자인 정치인 손학규는 대선주자로서의 입지를 다진 계기가 됐지만, 정치인 강재섭은 사실상 정치 은퇴 수순을 밟았다. 후배 정치인들도 이런 결과를 인지하고 있다. 총선 때마다 험지출마론이 봇물을 이루지만 이를 선뜻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다.
제22대 총선 역시 다양한 이유에서 험지출마론이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험지에 출마하는 정치인은 누가 될까. 그는 당선의 기쁨을 맛보며 정치 도약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까. 아니면 혹독한 정치 쓴맛을 경험하게 될까. 험지출마론의 대상과 결과는 제22대 총선의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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