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구 치매안심센터 가보니 … 태블릿 앱 이용 인지훈련 한창
8년째 출석하며 초기부터 잘 관리하니 … 악화 없이 일상생활 유지
집·요양시설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선입견 금물
"지애와 아영이는 12시에 영화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지애는 약속 시간에 도착했지만 아영이는 30분 늦었습니다.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영화의 제목과 상영시간을 찾아 옮기세요."
지난 17일 오전 서울 성북구보건소에 위치한 치매안심센터 내 쉼터. 최종찬 할아버지(82)가 태블릿 속 영화상영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문제를 풀었다. 영화관 매점에서 팝콘과 콜라를 고르고, 사이즈에 맞춰 가격까지 계산을 끝내니 화면엔 '정답입니다'라는 알림이 떴다. 태블릿에 깔린 이 애플리케이션(앱)은 장을 보고 계산하거나 식탁에 순서대로 음식을 차리고, 목적지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는 등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가정해 반복적으로 훈련시키는 방법으로 초기 단계, 또는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은 어르신들이 인지능력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 기억력을 되살리기 위해 숫자나 도형을 이용한 게임을 하거나, 건강상식과 어휘력 등을 퀴즈로 내 맞추게 하는 앱도 있다.
"요즘같이 날 더울 때는 학교에 나와 공부하는 게 더 편하고 좋아. 여기 문여는 9시만 되면 다들 일찌감치 나와서 두더지 잡는 게임도 하고, 혈압도 재고, TV 뉴스도 보고…." 최 할아버지는 치매안심센터를 ‘학교’라고 했다. 지난해 3월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뒤 일주일에 3번 이곳을 찾는다. 마찬가지로 치매 초기 단계인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버스로 네 정류장 거리를 혼자 다닌다. 쉼터에선 인지훈련뿐 아니라 매번 한지공예나 원예 활동 등 손을 사용하는 작업치료, 몸의 유연성을 훈련하고 활기를 불어넣는 체조 등도 따라 한다. 쉬는 시간엔 쉼터에서 요구르트나 스낵류의 간단한 간식도 나온다.
쉼터 프로그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땐 지하철을 탄다. 몇 년 전부터 다리 한 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가능한 한 천천히 움직이지만, 다행히 길을 잃은 적은 없다. 자녀 최정원씨(가명)는 "부모님 두 분 모두 치매 진단을 받으셨지만 아직까진 국과 반찬 등을 해놓으면 스스로 차려 드시고, 아침저녁으로 약도 잘 챙겨드신다"면서 "(요양원에 가지 않고) 최대한 집에서 지내실 수 있을 때까진 옆에서 살피며 모실 것"이라고 말했다.
8년간 치매 악화 없이 생활
신영희 할머니(77)는 2015년 처음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뒤 8년째 줄곧 센터에 다니고 있다. 재작년 코로나19로 센터가 문을 닫았을 땐 집에서 화상으로 연결한 비대면 프로그램에도 꼬박꼬박 참여했다. 은퇴한 남편이 할머니의 식사를 돕고 가사일도 일부 분담하고 있지만, 자녀들이 수시로 먹거리를 보내주고 이따금 외식도 함께할 때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신 할머니는 "센터에서 하는 공부도 좋지만 공예시간에 색종이랑 솜방울을 붙여 만든 작은 액자, 낚싯줄에 반짝이(비즈)를 꿰어 만든 장식들이 보물처럼 소중하다"며 "여기서 만든 건 매번 가져가 집안 곳곳에 장식해 놨다"고 전했다. 센터에서 다녀온 소풍(야외 치유 프로그램) 얘기를 하던 중엔 "어린이대공원 갔던 건 기억이 나는데, 저기 멀리 갔던 산은 어디였는지 나는 모르겠네"라며 속상해 했다.
전아영 성북구치매안심센터 작업치료사는 "신 할머니의 경우 처음 진단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년간 치매가 더 진행되지 않고 양호하게 유지되고 있는 사례"라며 "치매를 초기에 발견해 잘 관리하면 오랫 동안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치매에 걸렸더라도 치매 정도나 건강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기존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 전 팀장은 "최 할아버지나 신 할머니의 경우처럼 우리가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마트에서 장을 보다 마주치는 어르신 중 일부는 약하게나마 치매를 앓는 환자일 수 있다"며 "치매 환자는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치매 예방부터 간병 교육까지
치매 인구가 늘어나고 사회적으로 치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모든 치매 환자가 병원에 입원하거나 요양시설로 가는 건 아니다. 길을 잃고 헤매거나 대소변을 혼자 처리하지 못하는 중증 단계로 발전하기 전까지는 치매 환자도 가족과 주변의 도움을 받아 일상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 약을 복용하고 인지훈련과 운동으로 뇌 기능을 유지하면서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추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기 진단이 필요하다. 진단 결과에 따라 적절하고도 체계적인 치료와 관리를 받으며 삶의 질을 유지하고, 치매가 악화됐을 때 벌어질 다양한 문제를 미리 준비할 수 있다.
치매가 의심될 때 가장 먼저 찾을 수 있는 곳이 전국 각 지역에 위치한 256개 치매안심센터다.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무료로 치매선별검사를 받을 수 있고, 검사에서 치매 의심 소견이 나오면 협약 병원으로 연계돼 혈액검사, 뇌영상 촬영 등을 거쳐 정확한 치매 진단을 받게 된다. 검사 결과에 따라 인지 기능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치매환자에게서 흔히 발생하는 우울증, 수면장애 등을 개선하는 약물의 도움도 받는 것이 좋다.
치매 초기 단계(경도치매)에는 스스로 위축되거나 집에만 머물기보다 가까운 치매안심센터 쉼터 등을 이용하면서 전문적인 인지재활 프로그램으로 훈련을 받고 가족·지인과의 교류나 사회적 접촉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 좋다. 치매안심센터를 이용하는 데엔 별도의 비용 부담이 없다. 치매치료 관리비 지원과 실종예방 지문사전등록, 실종예방 인식표 발급 등 가족들을 안심시켜줄 수 있는 실질적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아직 치매가 아닌 어르신들을 위한 치매예방교실, 인지저하나 경도인지장애를 받은 어르신들을 위한 인지강화교실 등도 운영된다. 치매환자 가족에게는 치매 질환의 특성부터 돌봄 방법, 간병 스트레스 관리법 등 상담·교육도 이뤄진다. 센터의 안내를 받아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노인장기요양 서비스를 신청하고 등급 판정을 받으면 치매 어르신이 가정에 거주하면서 요양시설의 주야간보호 서비스나 방문요양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국 치매안심센터에 등록된 치매환자는 48만8967명, 경도인지장애를 앓고 있는 노인은 13만4226명에이른다.
한편, 중증 이상의 치매 환자이거나 보호자가 가정에서 돌볼 수 없는 경우, 다른 질병 등으로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는 노인요양시설, 노인요양공동생활가정 등 민간 노인의료복지시설의 도움을 받거나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정부는 특히 2016년 '치매전담형 장기요양기관' 제도를 도입하고 노인요양시설 내 치매전담실, 치매전담형 공동생활가정, 주야간보호시설 내 치매전담실 등에서 치매전문교육을 받은 전문인력을 배치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2017년 말 54곳이었던 치매전담형 장기요양기관은 2019년 220곳, 지난해 370곳으로 대폭 늘었고, 같은 기간 입소인원도 600여명에서 3800여명으로 증가했다.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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