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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 흘러도 여전히 5·18 고통…하루빨리 진상규명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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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고 이강하 화백 아내 이정덕씨

'5·18 주동자' 꼬리표 가시밭길…꿈도 가정도 산산조각

"수십년 흘러도 여전히 5·18 고통…하루빨리 진상규명 돼야" 이정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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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호남취재본부 박준호 기자]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5·18민주화운동이 42년이나 지나서 무뎌진 것인지 이정덕씨는 환하게 웃으며 맞아줬다. 하지만 인터뷰 중간중간 한 섞인 목소리를 통해 그의 5·18은 아직도 진행형임을 느낄 수 있었다.


1979년 봄. 전남 영암에서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평범한 교사였던 이씨는 무료한 일상에 알록달록 오방색을 담아내고자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운명 같은 인연을 만났다.


이씨의 눈앞에 있던 미술강사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언제나 정의로웠다고 한다. 그가 바로 5년 뒤 이씨와 부부의 연을 맺은 고 이강하 화백이다.


만남을 이어가면서 데이트도 하고 서로에게 의지가 돼 주면서 행복한 나날을 이어가는가 했지만 이 화백의 정의로운 성격에 불씨를 댕긴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5·18광주민주화운동. 광주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이 정점으로 치달을 즈음, 이 화백은 시민군들과 함께 영암경찰서에서 무기를 챙겨 광주로 출발하면서 5·18에 본격 뛰어들었다.


이를 가까이서 본 이씨는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이런 이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화백은 광주로 향하는 모든 길이 막히자 강진으로 이동해 항쟁을 이어갔다.


광주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씨가 할 수 있는 것은 남자친구인 이 화백에 대한 지지와 별 탈 없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옛 전남도청의 진압 작전으로 그렇게 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고 다시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가는가 싶었지만 또 다른 시작에 불과했다.


이씨는 “그 무렵 매미 울음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리는 계엄군의 총칼에 의해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울음소리, 아내의 울음소리, 부모를 잃은 자식의 울음소리에 묻혔다”고 회상했다.


항쟁이 끝나고 이씨는 이 화백과 영암에서 며칠을 지냈다. 하지만 이 화백은 결국 영암경찰서로 체포돼 유치장에 갔다.


이씨는 이 화백에게 “남 탓하지 말고 절대 비겁하게 행동하면 안 된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걱정에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면회를 가도 볼 수가 없어 책과 속옷 등을 유치장에 넣어주면서 뒷바라지를 했다. 영암경찰서 유치장, 상무대를 거쳐 밖으로 나온 이 화백의 초췌한 몰골을 이씨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온몸이 구타와 고문의 흔적으로 보이는 상처투성이였다. 이씨는 그런 그를 뒷바라지하면서 다시 평범한 일상을 꿈꿨지만 물거품이 돼 버렸다.


이 화백이 또 다시 지명수배되면서 감시를 피해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조선대 강당부터 장성에 있는 지인 집, 창고, 친척 집 등을 전전하는 이 화백을 보는 이씨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이 화백이 또다시 잡혀가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했으며 전화기가 울리면 이 화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라는 생각에 덜컥 겁부터 났다고 한다.


한 번씩 만나러 갈 때면 항상 뒤에 누가 따라오지는 않았는지, 누가 잡으러 오지는 않는지 주변을 경계하느라 밥 한 끼도 마음 편히 먹어본 적도 없었다.


보다 못한 이씨와 최영훈 교수는 이 화백에게 자수를 권유했고, 1980년 11월 이 화백은 ‘5·18 주동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결국 이 화백은 대법원까지 간 끝에 징역 8개월·집행유예 1년의 형이 확정됐다. 징역 뒷바라지를 하느라 허리가 휠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 시절 둘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5·18이 2년이 지난 1982년 3월 이씨는 광주 서산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고 그해 둘 사이에 금쪽같은 딸이 생겼다. 이후 1984년 부부의 연을 맺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하나를 더 갖게 됐다.


네 식구가 됐고 시간이 흘렀지만 경제적으로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인 이 화백이 5·18로 인한 전과 때문에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 씨는 “네 식구가 같이 지냈던 작업실 비용도 마련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적 압박이 너무 심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03년 8월 더는 광주에서 생활이 어려워진 이씨 부부는 고향인 영암에 폐교 한 곳을 임대해 귀향했다. 5년간 작업을 통해서 다시 세상에 나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이 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두 달 뒤 이 화백의 몸에 이상 증상이 왔고, 직장암 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이 화백은 5년간 작품 생활이 아닌 투병 생활 끝에 결국 하늘의 별이 됐다.



이씨는 “나와 내 남편은 5·18로 인해 고통스럽게 살아왔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해서 오월 어머니집에 있는 5·18유가족의 한을 듣지만 눈물부터 난다”면서 “아버지를 잃은 딸, 남편 잃은 아내, 오빠 남동생 잃은 남매, 자식 잃은 어머니 중 평생을 눈물로 지새다 돌아가신 분도 있다.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돼 유가족들의 아픔의 눈물을 닦아줬으면 좋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호남취재본부 박준호 기자 juno12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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