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워싱턴DC 동행기자단 인터뷰…퇴임 앞두고 소회 털어놔
"소부장 대책 기억에 남고, 부동산 안정화 못해 아쉬워"
후배들에겐 "근본은 학연·지연 아닌 자기 열정과 성실함이 쌓은 평판"
[아시아경제 워싱턴(미국)=권해영 기자] '임기 3년 5개월 역대 최장수 기획재정부 장관, 추가경정예산(추경) 7번 포함 예산만 11번 편성, 전대 미문의 코로나19 팬데믹 수습'.
문재인 정부 2기 경제 컨트롤타워인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쓴 기록들이다. 2018년 12월 취임 후 1년여 만에 코로나가 발생하자 정부 지출을 대폭 확대, 위기 수습을 위한 '코로나 소방수'로 나선 동시에 급속도로 악화되는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려는 '나라 곳간지기'까지 상반된 역할을 소화해야 했다. 한국 경제 사령탑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홍 부총리는 다음달 10일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부총리 임기를 마친다. 지난 17~22일(현지시간)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 참석 등을 위해 미국 워싱턴DC와 뉴욕을 방문한 홍 부총리는 여러 차례에 걸친 동행기자단과의 만남에서 3년 반의 부총리 임기, 37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는 소회를 털어놨다. 워싱턴DC는 홍 부총리가 2007~2010년 재정경제관으로 근무한 곳으로, 홍 부총리는 사실상 마지막 출장을 재경관 시절 3년을 보낸 워싱턴에서 마무리하게 됐다.
"부총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반대로 공격받았던 일이었습니다."
홍 부총리는 워싱턴DC에서 열린 G20 취재를 위한 동행기자단과의 인터뷰에서 "임기 3년 반 중 2년 반이 코로나 시기였는데 위기를 맞아 극복하고 경제를 회복하려고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며 이 같이 밝혔다. 그는 "(정치권의 주장에) 내가 입을 닫고 있으면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이 기정사실이 돼 즉시 반대했다"며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자리에서 물러나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홍 부총리는 코로나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재정 지출 방식을 놓고 매번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갈등을 겪어 왔다. 전국민 대상 보편 지원을 주장하는 여당에 현금성 지원 축소, 선별 지원 등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2월 국회 연설을 통해 4차 재난지원금 전국민 지급을 발표했을 땐 페이스북을 통해 즉각 반대 입장을 밝혔다. "정말 나쁜 사람", "정치를 하고 있다" 등의 원색적인 비난은 물론 '홍남기 경질론'까지 여권에서 쏟아졌다.
그는 "정치권이 하라는 대로 하면 재정과 국가가 저 산에 올라갈지도 모를 일"이라며 "재정은 어쩔 수 없다. 다시 돌아가도 또 욕을 먹으면서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3년 반 임기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는 코로나 위기 극복과 함께 소재·부품·장비 대책, 한국판 뉴딜 등 세 가지를 꼽았다.
그는 "한국판 뉴딜은 디지털, 그린 경제로 가는 과정의 프로젝트"라며 "새 정부에서 이름을 바꾸고, 미세조정 할 순 있지만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순 없다고 본다"고 밝혔다. 2019년 7월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수립한 소부장 대책에도 큰 애착을 드러냈다. 홍 부총리는 "사무관 초년기인 1986~1987년 소부장이 핵심 원인인 대일 무역역조 개선 대책을 세우느라 밤을 꼬박 새웠는데 한 세대가 지나 장관이 돼 다시 그 대책을 만든 것"이라며 "앞으로 한 세대 뒤엔 우리 후배들이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도록 예산실 반대에도 고집을 피워 소부장 특별회계를 신설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소부장 경쟁력 제고에 2020년 2조1000억원, 2021년 2조6000억원 규모의 정부 예산이 투입됐다.
문 정부 2기 경제 사령탑인 만큼 공공 부문 중심의 고용, 민간 활력 저하, 부동산 가격 급등 등 시장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평가와 관련해 홍 부총리 역시 그 책임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부동산 대책과 관련해 홍 부총리는 "가격이 이렇게 올라가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시간이 있어 상당폭으로 하향 안정세를 시키고 나갔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임기 중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로 꼽았다.
재정준칙 법안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서발법)을 통과시키지 못한 것도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했다. 그는 "코로나 위기 극복 과정에서 재정지출은 불가피했지만 앞으로 재정 정상화 과정에서 재정 긴축이 꼭 필요하다"며 1년 반 동안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재정준칙이 새 정부에선 꼭 법제화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우리나라 국가채무는 1075조7000억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은 50.1%로 현 정부 출범 첫해인 2017년 36%에서 14.1%포인트나 늘어났다. 재정 건정성 회복이 시급한 상황이다. 서비스산업 육성을 위해 재정·세제·금융 지원 방침을 담은 서발법과 관련해선 "2012년 정책조정국장 시절 법안을 처음 발의했는데 부총리가 된 지금까지도 11년째 입법이 안됐다"며 "다음 정부에선 꼭 입법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 부총리는 역대 기재부 장관 중 정치권의 포퓰리즘 압박에 가장 많이 시달린 장관이다. '홍백기', '홍두사미' 등 홍 부총리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보여주듯 정치권 특히 여당의 목소리는 홍 부총리 재임 기간 중 역대 어느 국회보다 컸다. 정책 입안자 입장에선 그만큼 정책을 펼 여력이 줄어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정 관계 불균형으로 정부의 어려움이 크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홍 부총리는 "입법을 통해 정책이 완결되는 경우가 많아 당정 관계에서 당의 보이스, 파워가 무척 세졌다"며 "입법 내용에 대해 행정부가 정책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을 가질 수 있는데 이와 관계없이 입법을 추진하면 정책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 점에서 보면 정당의 보이스가 굉장히 커졌고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 커졌다"며 "그러면서 정치권하고 많이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고 돌아봤다.
홍 부총리는 다음달 새 정부가 출범하면 37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한다. 퇴임 후 계획과 관련해선 "섬을 좋아해 우리나라 큰 섬은 다 가보고 싶다"며 "이제 자연인으로 돌아간다"고 홀가분하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묻는 질문에 홍 부총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국과장 자리와는 달리 소외된 자리,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것 같은 자리라도 자기 평가는 다 쌓인다"며 "어느 자리에 있든 주어진 업무를 열심히 하면 그 평판이 쌓여 올라간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근본은 학연도, 지연도 아닌 자기 열정과 성실함이 쌓여진 평판"이라며 "공무원은 그렇게 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워싱턴(미국)=권해영 기자 roguehy@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