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 잠겨있던 세월호가 3년 만에 물위로 올라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지 열이틀만의 일이다.
그동안 세월호는 기술적 한계, 기상악화 등의 이유로 3년이나 물속에 잠겨있었다. 그랬던 세월호가 이렇게도 쉽게 거짓말처럼 우리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호가 그 모습을 드러내 9명의 미수습자들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나 1073일 동안에도 밝혀지지 못한 세월호 침몰 원인을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또 하나의 큰 사건은 하필 대통령이 탄핵된 직후, 세월호 인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타이밍의 절묘함이라니! 세월호 인양 장면을 보면서 먼저 내 머리를 때린 것은 3년 동안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것은 기술적 한계나 기상악화 때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왜 지난 1073일 동안 불가능했던 일들이 대통령 탄핵 직후 가능하게 되었을까? 세월호 인양업체인 상하이 샐비지와의 계약은 2015년에 체결되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인양업체가 바뀐 것도 아니다. 조차가 가장 작아 물살이 제일 잔잔해진다는 소조기는 한 달에 두 번 온다. 그동안 이 소조기는 침몰 이후 70번, 인양업체 확정 이후 38번이나 있었다. 그러니 지난 3년 동안 세월호가 인양되지 못하는 백 한 가지 이유들을 들어왔던 내게는 이렇게 눈 깜작할 새에 세월호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일이 믿기지 않는 일일 수밖에 없다. 나만 그랬을 것 같지 않다.
그동안 들었던 세월호 인양 관련 이야기들이 눈앞의 허공중에 뒤엉킨 채 마구 날아다닌다. '부력재', '구멍 2개', '구멍 140개', '선미 램프', '절단', '반잠수정', '소조기', '대조기', '선수 들기', '바지선', '인양방식 변경', '유실물 방지망', '최저가 인양업체 입찰', '상하이 샐비지 적자', '상하이 샐비지 몸값 수직상승' 등등. 세월호가 인양된 지금 또 다른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정치적 이유로 인한 고의 인양 지연', '기술적 무지로 인한 음모론' 등 상반된 이야기들이 여러 버전으로 제시되고 있다.
나는 지금 이렇게 둥둥 떠다니는 말들 중에 어떤 것이 진실을 위한 언어이고 어떤 것이 거짓을 위한 언어인지 가릴 수가 없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상태는 더 큰 혼란과 불신과 불안을 양산해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지난 3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정치전문가도 아니고 기술전문가도 아닌 내게는 세월호 인양의 이 절묘한 시기가 결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나는 공포영화를 보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난 뒤의 그 서늘함과 찝찝함이 오래도록 남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내려가자마자 세월호가 올라오다니…. 그래서 바로 '이 시점에' 들어 올려지는 세월호의 장면은 내게 공포영화보다 더 센 서늘함과 찝찝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지난 3년 세월의 본질이 드러나는 듯한데 아직도 그것은 형체가 희미한 것일 뿐 실체화되지 못한 상태라 더욱 그렇다. 영화야 보지 않을 선택의 자유라도 있지만 이건 내 의지 밖의 일이다.
갑자기 내가 살아왔던 이 나라가 그렇게도 내가 거부해 왔던 공포영화의 배경이자 현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몸서리 쳐졌다. 거짓말들이 난무하고 그것이 진실로 용인되기를 강요하는 세상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아무리 기술적인 어려움을 얘기하며 탄핵과 인양의 상관관계를 부정한다 해도 세월호라는 단어를 제일 싫어했고 세월호 리본은 물론 노란색조차 싫어했다는 국정농단 세력들의 이야기가 특검 기간 내내 흘러나왔던 걸 생각하면 이 절묘한 시점이 그리 명쾌하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동안 참으로 질기게도 인양을 막아왔었구나 싶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새 정부가 세워지기 전에 서둘러 인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힘이 작동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세월호 특조위가 말도 안 되는 어거지 논리에 의해 사실상 8개월이나 활동 기간이 줄어 든 채 끝났지만 현실은 그 어거지 논리대로 흘러갔다. 3월21일부터 가동된 선체조사위원회의 활동기간은 4개월 연장 가능한 6개월이라고 한다. 총 10개월 안에 세월호의 진실이 규명될 수 있을지 염려된다. 공포영화에서 잔인한 장면보다 더 큰 공포는 느껴지기만 할 뿐 문 뒤에 누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 자체로부터 온다. 이건 영화 속 주인공에게만이 아니라 관객에게도 동일하다. '알 수 없음'이 주는 공포에서 우리 모두는 벗어나야 한다. 인양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공포영화의 엔딩자막은 아직 한참 후에나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끝에서 진실은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확인할 수 있을 때 우리 자신도 그것의 일부가 되어버린 공포영화는 비로소 끝날 수 있다.
강민정 (사)징검다리교육공동체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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