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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비선, 계선, 실선, 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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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비선, 계선, 실선, 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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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이 사는 집에 얼마 전 식구가 한명 늘었다. 두 살짜리 사내 놈이다. 처제가 둘째를 출산하려고 병원에 들어가면서 녀석을 며칠간 맡긴 것이다. 그 바람에 집안 서열에서 또 밀렸다. 서열 1위 마누라는 조카를 애지중지 먹이고 씻기고 재우느라 분주하다. 서열 2ㆍ3위 두 아들은 서로 먼저 녀석을 안아주겠다며 난리법석이다.


녀석은 어느새 서열 4위를 꿰찼다. 빨래도 녀석 옷이 먼저요, 목욕도 녀석이 우선이다. 녀석의 감성 발달을 위해 거실TV는 하루 종일 뽀로로를 틀어대고, 녀석의 안위를 위해 청소기는 분주하게 먼지를 빨아들인다. 서열 5위는 다만 녀석의 기저귀를 갈아줄 뿐이다. 손에 똥이 묻을까봐 벌벌거리면서. 이런 처지가 어찌나 처량하던지 스스로 이렇게 다독였다. '세상이 비선 실세로 떠들썩한데 우리 집에도 실세가 있구나!'

며칠 전 아파트 주민을 대상으로 투표가 진행됐다. 그 전부터 몇 차례 안내 방송이 있었지만 기저귀를 갈아주느라 혼이 비정상이 돼(라고 핑계를 대지만 실은 안내 방송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무엇을 위한 투표인지 알지 못했고 딱히 투표를 할 의지도 없었다. 그러던 중 똥기저귀 가득한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나갔다가 그만 경비 아저씨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경비 아저씨 "사장님, 투표하셨어요(이 분은 언제나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기분은 나쁘지 않다)."
나 "예? 투표요…(상황이 불리할 때는 침묵을 고수하는 것도 방법이다)."
경비 아저씨 "아, 안 하셨구나. 이리와서 투표하세요(족집게다. 경비원 그만두고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나 "아, 예, 예(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때는 대세를 따르는 수밖에)."

온 우주가 도와 무사히 투표를 끝낸 뒤 손가락에 묻은 인주를 휴지로 닦고 있는데 경비 아저씨가 부연설명을 늘어놨다. 얘기인즉, 아파트 단지에 흡연공간이 몇개 있는데 너무 많으니 줄이자는 의견이 부녀회에서 제기됐다. 물론 흡연자들의 반발이 거셌다. 그 바람에 몇차례 '밀당'이 이어지다가 결국 투표까지 가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경비 아저씨는 투표를 독려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았는데 주민들은 찬반 결정 과정에서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아파트 단지 내 시시콜콜한 정보를 좌르르 꿰고 있고, 각 가정의 우편물을 대신 받아주고, 단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알뜰히 챙겨주는 신뢰 만점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저 아저씨도 아파트 단지의 숨은 실세라고 할 수 있다.


비밀리에 작용하는 '비선(秘線) 실세' 때문에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투명하고 체계적인 계선(系線) 시스템은 엿 바꿔 먹은지 오래다. 눈만 뜨면 속속 드러나는 비선 실세들의 국정 농단에 국민들은 한숨이 깊어진다. 드라마보다도 더한 막장 드라마에 서민들은 뒷목을 부여잡는다. 이게 나라냐! 이게 21세기냐! 우리가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이 됐냐는 자괴감이 밀려든다.


실은 권력 주변 어디나 비선이 있게 마련이다. 기업에는 경영자의 눈과 귀를 홀리는 세치 혀가 존재하고, 국회나 공무원 조직에는 동아줄만 찾아다니는 모리배가 한 둘이 아니다. 공짜 권력에 취해 오만방자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빽' 없고 힘없는 직장인들은, 성실함과 근성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서민들은 '나는 실선(實線)도, 점선(點線)도 아니다'며 씁쓸히 술잔을 기울인다. '어떤 일에서든 성공이나 실패를 결정하는 진짜 문제는 사람'이라는 마이클 해머의 말처럼, 그것이 '비선'이든 '측근'이든 '그림자'든 결국은 사람이 문제다. 저 귀여운 2살짜리 아이나, 언제나 친절한 경비 아저씨 같은 실세라면 얼마든지 환영하겠지만.


이정일 산업부장 jaylee@asiae.co.kr <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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