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로렌스'서 또한번 변신한 메릴 스트리프
배역의 의상·분장뿐만 아니라 말투·억양까지 꼼꼼하게 분석해 표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선 이탈리아 여인의 영어 자연스럽게 구사
'철의 여인' 대처의 1980년대 목소리도 재현
24일 개봉한 '플로렌스'에선 음치 연기…음역대까지 분석해 표현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완전히 백지 상태와 같은 배우 섭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관객은 배우가 이미 끝낸 배역에 대한 잔상을 무의식중에 간직한다. 그래서 어떤 연기는 전작에서 이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부른다. 배우들은 다채로운 배역을 맡아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있다. 40대가 되면 섭외가 뜸해지는 여배우들에게는 꿈같은 목표다. 그들은 본보기로 메릴 스트리프(67)를 자주 꼽는다.
뚜렷한 변신
스티븐 제이 슈나이더는 자신의 책 '501 영화배우'에 스트리프에 대해 "그 세대에서 가장 탁월한 여배우"라고 썼다. 거의 모든 장르를 아우르며 다양한 매력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스트리프는 아카데미시상식 연기상 후보에 열네 차례(2회 수상) 올랐다. 배경에는 알파고 같은 연기가 있다. 배역을 자신의 스타일에 맞추지 않는다. 최대한 다가간다. 자신의 해석을 더해 무섭게 몰입한다. 스트리프는 "배역에 심취하는 것은 그 배역으로 순간순간 살아있을 때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그 순간을 위해 연습할 수도 있지만 삶은 매 순간을 서로 주고받을 때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촬영을 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될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고 믿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했다.
스트리프는 몰입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한다. 특히 의상과 분장에 신경을 쓴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65)의 '죽어야 사는 여자(1992년)'에서 그가 연기하는 뮤지컬스타 매들린 애쉬턴은 풍성한 금발머리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다. 속눈썹으로 눈매를 강조해 젊은 여인의 관능미와 허영심을 동시에 나타낸다. 중년시절로 넘어가면 겉모습은 달라진다. 아이라인만 선명한 얼굴에 단조로운 드레스를 착용해 질투심을 부각한다. 알란 파큘라 감독의 '소피의 선택(1982년)'에서는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희망을 잃어버린 소피를 표현하려고 삭발에 가까운 머리와 창백한 피부를 보여준다. 데이빗 프랭클 감독(57)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년)'에서는 아치형 눈썹과 붉은 입술, 검은 정장, 하얀 블라우스 등으로 까다로운 취향과 독선적인 스타일을 보여준다. 하지만 집에서는 장식을 벗고 자연스럽게 앞머리를 내려 가족적인 면을 부각한다. 말투와 억양도 달라진다. 사무실에서의 냉소적인 느낌을 가라앉히고 다정한 엄마가 된다.
목소리는 스트리프의 큰 경쟁력이다. 역할에 맞게 억양, 말투 등을 꼼꼼하게 표현한다. 시드니 폴락 감독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년)'에서 그는 덴마크식 영어로 캐런 블릭센을 그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86)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년)'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여인 프란체스카 존슨을 연기하기 위해 시종일관 이탈리아 톤에 맞는 영어를 유지한다. 프레드 쉐피시 감독의 '프렌티(1985년)'와 카렐 라이츠 감독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1981년)', 필리다 로이드 감독(59)의 '철의 여인(2011년)', 사라 가브론 감독(46)의 '서프러제트(2015년)' 등에서는 영국 표준 발음을 구사한다. 특히 철의 여인에서는 오랜 연습으로 마거릿 대처의 1980년대 목소리를 똑같이 재현한다.
섬세한 연기
스트리프는 배역이 부각되는 영화에 자주 출연했다. 그래서 실제 인물도 많이 그렸다. 방사능 노출사고를 다룬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실크우드(1983년)'에서 캐런 실크우드, 프렌치 셰프의 일대기를 다룬 노라 에프론 감독의 '줄리 & 줄리아(2009년)'에서 줄리아 차일드, 바이올리니스트의 교육을 그린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뮤직 오브 하트(1999년)'에서 로베르타 갸스파리 등이다. 지난 24일 개봉한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75)의 '플로렌스'에서는 세계 음악사에 음치로 기록된 플로렌스 젠킨스를 그렸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노래를 좋아하지만 자신이 음치인 줄 모르는 여인이다.
성악가를 꿈꿨을 만큼 노래를 잘 부르는 스트리프에게 음치 연기는 어려운 도전이었다. 단순히 노래를 못 불러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젠킨스의 실제 목소리를 여러 차례 들으며 보컬 음역을 맞췄다. 스트리프는 "젠킨스는 F에서 높은 C까지 가능했다. 명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후기에 유지하고자 했던 음역인데 매우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최악의 가수였던 만큼 예측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었지만 노래 마지막에 음정을 정확히 맞출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느낌을 심어야 했다"고 했다. 카네기홀에서는 촬영을 사흘 안에 끝내야 했다. 스트리프는 "어떤 성악가도 '밤의 여왕 아리아'를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부르지 않지만 하루에 여덟 번 불렀다. 다음날에도 또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그는 "목소리가 금방 가버려서 향나무로 목욕하고 밤새 차를 마셨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면 목소리가 엉망이었다"고 했다.
이 영화는 코미디지만 관객에게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가치를 묻는다. 도전의 아름다움도 강조한다. 스트리프는 젠킨스의 음악적 관심을 각 신마다 다채롭게 표현한다. 피아노에서 좋아하는 선율이 흐를 때마다 왼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경청한다. 피아노에 다가가 턱을 괴며 연주자를 사랑스럽게 쳐다보기도 한다. 젠킨스가 음치인줄 몰랐다는 설명을 부연하려고 각 신마다 세세한 표현도 넣었다. 30대 초반에 입었을 법한 옷과 머리 스타일을 고집하고, 천진난만한 표정을 잃지 않는다. 이런 디테일은 아주 평범한 신에서도 엿보인다. 공연을 마치고 선물을 받는 장면에서 "지금 열어봐도 되죠"라고 묻는데 이미 포장지는 뜯겨 있다. 피아노 선생인 맥문(사이몬 헬버그)의 집을 찾아가 설거지를 해주는 신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을 보이는데, 칼을 떨어뜨리고 화들짝 놀란다. 젠킨스가 얼마나 곱게 자랐으며 아이처럼 순수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트리프는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장면에서도 학예회에서 엄마 눈치를 살피는 어린아이처럼 관객을 힐끗힐끗 쳐다본다. 몇몇 신에서는 때 묻지 않은 모습이 바보처럼 나타난다. 하지만 스트리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말한다. "어릴 적 나 자신과 마주한다면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몸무게에 신경 쓰지 마라. 시간낭비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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