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 연기 변신한 손예진 "색다른 캐릭터 많이 했다 생각했는데 여전히 청순가련 이미지더라"
"'비밀은 없다'는 시작부터 다른 방법으로...촬영 직전까지 불안할 만큼 모든 장면이 새로운 도전"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손예진(34)은 처음에 파랗게 다가왔다. 2001년 그리스 미코노스 섬을 배경으로 한 이온음료 광고. 앳된 얼굴로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를 찰랑댔다. 새하얀 천을 에게해의 빛처럼 파랗게 염색했다. 초승달 같은 눈웃음에 뭇 남성들은 혼을 뺏겼다. 충무로도 열광했다. 그녀가 막 입학한 서울예술대학을 다니지 못할 만큼 러브콜을 보냈다.
손예진은 한때 청순가련한 배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연애소설(2002년)', '클래식(2003년)' 등으로 로맨스 히로인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그런데 30대가 되면서 초승달 같은 눈웃음은 사라졌다. 대신 각양각색의 배역으로 매번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재난 드라마 '타워(2012년)'의 서윤희, 스릴러 '공범(2012년)'의 정다은, 해양 블록버스터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년)'의 여월 등이다. 모두 능동적이고 거리낌이 없다. 그녀는 '도전'이라고 했다.
"안주하고 싶지 않았어요. 언젠가 지었을 법한 표정과 말했을 법한 대사를 반복하는 건 재미없잖아요. 편한 대로 연기하면 똑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어요. 내가 생각한 대로 연기를 하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고요. 색다른 캐릭터를 많이 맡아서 청순가련한 이미지를 떨쳐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주위에서 여전히 초창기 영화들을 많이 얘기하세요. 선물 같은 작품들이죠. 하지만 더 폭 넓은 연기를 잘 하고 싶어요."
지난달 23일 개봉한 스릴러 '비밀은 없다'는 손예진의 도전에서 정점이 될 수 있다. 국회 입성을 노리는 신진 정치인 김종찬(김주혁)의 아내 김연홍을 연기했다. 물심양면으로 남편을 보필하는데, 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딸 김민진(신지훈)이 실종된다. 남편과 참모진은 딸의 행방보다 선거의 향방을 바꾸는데 여념이 없다. 김연홍은 혈혈단신으로 딸의 생사에 매달리고, 여러 가지 비밀과 마주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인물은 노심초사하다가 절규한다. 핏기 잃은 얼굴에서 나오는 절절한 호소로 관객의 가슴을 두드린다. 이경미 감독(43)은 이런 모습을 원하지 않았다. 김연홍은 선거활동에 여념이 없는 남편의 뺨을 후려친다. 핏발 서린 눈으로 "정치고 뭐고 이제 다 필요없다"며 악을 쓴다. 지지부진한 경찰 수사에 분통을 터뜨리고 비밀을 풀기 위해 자해까지 한다. 정치인의 아내와 딸을 잃어 슬픔에 잠긴 엄마 사이에 갇히지 않고 무서울 정도로 현실에서 폭주한다.
"시나리오를 '이게 뭐야'라는 생각으로 단숨에 읽었는데, 한참 폭발하다가 갑자기 차분해지는 감정 변화를 어떻게 그려야할지 막막했어요. 참고할 만한 영화나 책도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장기나 바둑을 둘 때 대부분 자신만의 일정한 방식이 있잖아요. 이번 영화는 시작부터 다른 수를 둬야 했어요. 그래서 촬영 직전까지 불안했죠. 모든 신들이 도전이었어요."
영화는 서술에서도 규칙을 탈피했다. 감정과 표현을 다르게 하는 손에진의 연기가 더 낯설 수 있다. 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김연홍은 지역감정의 피해자다. 상대 정당의 인신공격을 받는다. 축적된 분노는 딸이 '왕따'였다는 사실과 주위의 무관심을 동시에 마주하면서 처절한 모성애로 드러난다. 그래서 차분함을 유지하려고 애를 쓸 때 오히려 엄마의 절절한 심정이 나타난다. 예고편에 등장하는 김연홍의 운전 신이 대표적이다. 집중하려고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하자"라고 중얼거리는데,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고 한다. 딸에게 소홀했던 자신을 향한 원망, 남편에 대한 증오, 진척 없는 수사에 대한 답답함 등이 황폐한 얼굴에서 묘하게 새어나온다. 시나리오만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얼굴이다.
"레커차에서 촬영했어요. 이경미 감독이 다른 차에서 '아무 말이나 중얼거려보세요'라고 주문했죠. 내가 김연홍이라 생각하고 어떤 마음이든 보여주려다 보니 '생각하자'라는 말을 하게 됐어요. 이경미 감독이 '아주 좋았다'고 칭찬하더라고요. '김연홍의 캐릭터가 단 번에 보인다'고 했죠. 아주 어려운 과제였지만 그렇게 하나하나씩 함께 만들어가며 독특한 캐릭터를 완성한 것 같아요."
비밀은 없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독창적인 전복에 박수를 보내는가 하면 독특한 스타일에 집착한 나머지 이야기의 정합성이 깨졌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손예진의 섬세한 연기에는 이견이 없다. 선거활동을 진두지휘하지만 참모진 사이에서 은근히 이질감을 드러내는 등 장면마다 미묘한 감정을 표현한다. 딸을 잃고 이상하게 변하는 캐릭터가 크게 어색하지 않다. 딸을 찾기로 결심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이경미 감독의 데뷔작 '미쓰 홍당무'에 나오는 양미숙(공효진)을 떠올리게 한다. 손예진은 촬영을 앞두고 공효진에게 많은 조언을 받았다. 그러나 감독은 매번 새로운 주문을 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신을 즉흥적으로 표현했다. 그 결과는 자신조차 낯선 새로운 얼굴이다.
"이경미 감독과 생각이 일치된 적이 거의 없었어요. '그것도 좋은데 이렇게 한 번 해보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 치열하게 연기하는 모습을 꿈꾸는데 이번 영화가 그랬던 것 같아요. 고통을 즐기면서 촬영했죠. 주위에서 '많이 힘들어 보인다'며 걱정했지만 희열이 있었어요. 내 생각과 전혀 다른 감독의 요구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가는 즐거움이랄까. 연기에 대한 생각의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이런 게 도전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는 보람 아닐까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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