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현진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 밝히면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한은이 기업 구조조정의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한다는 '당위론'과 중앙은행이 특정 산업의 구조조정에 발권력을 동원해 개입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냐는 '현실론'이 충돌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26일 주요 언론사 편집국장 오찬 간담회에서 "강봉균 위원장께서 한국형 양적완화 정책을 말씀하셨는데 이건 한번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그래서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추진이 되도록 힘을 쓰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한국판 양적완화는 지난 4·13 총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이 참패하면서 사실상 물거품이 된 공약이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한은이 산업은행이 발행한 산업금융채권과 주택금융공사가 발행한 주택저당증권(MBS)을 인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현행 한국은행법에는 한은이 정부 보증채만 살 수 있도록 돼 있어 한은법을 개정해야만한다. 이에 20대 국회가 여소야대 국면으로 전환되고 야당이 한국판 양적완화에 부정적인 반응을 내놓아 사실상 어려워진 것으로 판단됐다. 여당 내부에서도 '물 건너 갔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지금까지 정부는 한국판 양적완화 대신 한은이 국책은행에 출자를 하는 방식을 현실적으로 가장 유력한 방안으로 검토해왔다. 국책은행인 산은과 수출입은행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손실분담 능력을 갖기 위해 자본확충이 필요한 상황에서 한은이 출자하는 것이다. 정부도 출자를 할 수 있지만 국회 통과 등의 절차가 있어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만 거치면 출자가 가능한 한은이 적합하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현행법상 한은이 수은에는 출자할 수 있지만 산은에는 할 수 없다는 한계가 남는다. 산은에 출자하기 위해서는 산은법을 개정해야한다. 한은법 개정과 마찬가지로 국회의 문턱을 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산은채 매입 방안을 다시 지지하는 의사를 밝히면서 한은의 셈법은 매우 복잡해졌다. 한은은 전반적으로 발권력 동원에 대해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다. 해운업을 시작으로 기업 구조조정이 앞으로 계속되는 상황에서 한 업종만 지원할 경우 앞으로도 계속 지원해야할 상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이에 한은은 그동안 '관련법규와 중앙은행의 기본원칙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수행해 나가겠다고 밝혀왔다.
한은은 이 총재를 비롯한 집행부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갈 예정이다. 기재부, 금융위, 산은, 수은과 함께 꾸리는 태스크포스(TF)에도 참여해 논의를 함께 진행할 계획이다. 한은은 "구체적인 요청이 오면 한은이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논의해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