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영주 기자] 정부가 기업구조조정에 팔을 걷어부쳤다. 그동안 시장 자율에 맡긴다던 정부의 방침은 180도 뒤바뀌었다. 경제정책 수장이 부실기업의 법정관리나 인수합병(M&A) 가능성을 언급하고 나섰다. 정부가 전방위 압박을 펼치고 나선 것은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적극 나서지 않고 눈치보기로 일관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자칫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대량실업 등 고용불안은 물론 채권은행 부실 등 국민경제에 연쇄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운업계에서는 "정부의 공개적인 압박이 기업 정상화에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불만을 감추지 않고 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1일 "구조조정이 시장과 채권단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지만 어려움이 발생한다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유 부총리는 "(구조조정의) 스케줄이 있고 스케줄 대로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정부가 손 놓고 볼 수만은 없다"고 강조했다. 더 이상 정부가 관찰자로만 남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발언이다.
그는 선주사와 용선료 협상을 벌이고 있는 현대상선에 대해 "유동성 등의 정부 지원은 없다"고 언급한 뒤, "(용선료 협상이 잘 안될 경우에는) 법정관리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앞서 유 부총리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 참석차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했던 지난 15일(현지시간)에도 "공급 과잉업종·취약업종 구조조정을 더는 미룰 수 없으며, 빨리해야 한다"며 "제가 직접 챙기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유 부총리가 특정 기업을 거론하며 구조조정에 속도를 낼 것을 주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동안 정부는 기업 구조조정에 대해 '정부가 사기업의 구조조정과 M&A 등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기재부 고위관계자는 "한계기업 구조조정은 채권단과 자율적으로 해야 한다는 방침에 변화는 없다"면서도 "예상보다 구조조정 속도가 느린 기업을 마냥 지켜만 볼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일부 해운사의 경우 구조조정 당사자인 기업은 물론 선주사, 사채권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이들 모두가 양보하지 않으면 구조조정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기 어렵다"면서 "해운·조선 등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한 일부 업종을 중심으로 선제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부실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 부총리는 해운·조선 이외 업종에 대한 정부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는 "살펴보고 있는데 시장과 채권단이 판단해서 결정하는 게 좋다"며 선을 그었다.
해운업계에서는 정부의 과도한 압박과 개입이 기업 정상화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현대상선의 경우, 현대증권 매각 등 자구계획을 착실히 진행해오고 용선료 협상도 진행 중인 상황에서 정부가 강하게 압박하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해운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상선의 경우 용선료 협상을 진행 중인데 정부가 법정관리 가능성을 운운하며 조속한 협상타결을 종용하는 것이 시장의 불안감을 더욱 키울 수 있다"며 "해운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국제동맹(얼라이언스)에 가입하지 못하고 영업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까지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정부가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용선료 협상을 공개적으로 압박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하는 관행을 볼 때 협상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며 "정부가 국적해운사 두 곳 중 한 곳을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끊이질 않는다"고 언급했다.
세종=조영주 기자 yjcho@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