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리화가' 배수지, 조선 최초 여류소리꾼 진채선 연기
"내 평소 모습 많이 들어갔다" "연기력 논란? 상처받을 시간 없다"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두 가지가 궁금하다. 영화 '도리화가'에 나오는 배수지(21)의 연기와 판소리 실력. 당대의 금기를 넘어선 여성 소리꾼 진채선 역을 맡았으니 당연하다. 진채선은 남성의 전유물인 판소리 마당에서 통념을 뒤집고 명창이 된다. 고종 때 경회루 낙성연(落成宴)에서 출중한 기예를 발휘해 청중을 놀라게 하고 흥선 대원군의 귀를 사로잡아 첩실이 된다.
배수지를 20일 서울 삼청동에 있는 카페 '웨스트19'에서 만났다. 해맑은 표정에서 무거운 짐은 보이지 않았다. "당차고 순수한 면이 저랑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연기하는 동안 가수가 될 준비를 할 때 경험한 감정이 많이 떠올랐어요." 그래서일까. '도리화가'에서 진채선의 인생은 보기 어렵다. 잘해야 하는 판소리 역시, 영화가 절정에 이르러도 썩 돋보이지 않는다. 호흡이 불안할 정도라 "저 아이에겐 특별한 게 있네"라며 감탄하는 신재효(류승룡)가 실없어 보일 정도다.
이종필(35) 감독은 이 약점을 현악 클래식으로 메운다(또는 메우려 시도한다). 진채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영화 전체의 감정 흐름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누가 주연을 맡았어도 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충무로에서 판소리 잘하는 주연급 배우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사 담담의 백연자(46) 대표는 "얼마나 판소리를 잘 부르느냐보다 진채선과 비슷한 경험을 한 배우가 필요했다"고 했다. 이 감독은 "실력파 가수가 부르는 노래보다 가족이나 친구의 노래가 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면서 "배수지는 그런 점에서 금 가지에 옥 잎사귀와 같다. 여동생 같은 풋풋하고 친근한 이미지와 가수가 되기 위해 갈고닦은 노력의 흔적이 관객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고 했다.
이 감독은 촬영을 하면서 배수지에게 많은 요구를 하지 않았다. 진채선과 닮은 점을 찾아달라고만 주문했다. 이런 과감한 연출은 배수지와 함께 연기한 류승룡(45), 송새벽(36) 등이 능숙하게 영화의 정서를 이끌어갔기에 가능했다. 이번 작품에서 배수지의 연기력이 향상됐다고 평가받는 건 이들의 액션에 리액션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은 배수지와의 일문일답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캐릭터도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당차고 순수하게 소리꾼을 향한 열망을 키우는 모습이 나 자신과 많이 닮았다. 그래서 연기를 할 때마다 연습생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신재효와 진채선의 특별한 사제관계도 예뻐 보였다. 제안을 거절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
-판소리는 많이 접하지 못했을 텐데.
"부담이 컸지만 시나리오를 계속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판소리가 어려운 음악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근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걸 부르면서 마음의 울림까지 전한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았다."
-그래서 판소리 실력은 향상됐나.
"촬영 6개월 전부터 박애리(38) 명창의 가르침에 따라 판소리를 연습했다. 매번 노래를 녹음했는데, 최근 그것들을 다시 들으면서 실력이 향상됐음을 느꼈다."
-판소리가 어떤 음악이라고 생각하나.
"다른 노래들과 다르지 않다. 다만 민초들의 소리가 담겨 있다. 마음의 한 같은 거 말이다."
-판소리를 부르는 장면에서 계속 현악 클래식이 등장한다. 아쉬울 것 같은데.
"당초 목표가 한국적인 영화였는데 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인물의 감정선 등을 생각하면 동의하는 부분은 있다. 진채선이 성장하는 과정에 더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대중에게 드러나지 않은 이면이 진채선과 닮아 섭외됐다고 하던데.
"내 모습이 많이 들어갔다. 당차고 순수하다. 막연하게 무언가를 하고 싶어 달려간 점과 그 과정에서 사랑을 느낀 점 등도 똑같다."
-'건축학개론(2012)'에서 그런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면서 인물의 감정 선을 계속 끌고 가야 했다.
"몰입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촬영 현장에서 집중력이 좋아진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감성도 조금 풍부해진 것 같고."
-KBS 드라마 '드림하이(2011)' 등 연기 활동 초기에 연기력 논란이 있었다.
"그런 반응에 민감한 편이었다. 그런데 너무 바빠서 상처받을 시간도 없었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나 스스로 느끼는 아쉬움을 지우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 열 시간 동안 살수차가 쏟는 비를 맞으면서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다. 후회 없이 연기하고 싶었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처음 연기생활을 한 건 우연이었지만 작품을 하나씩 만나면서 연기에 대한 고민이나 생각이 많아졌다. 특히 '건축학개론'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을 만나면 그 도전의식과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가수와 배우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나란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회가 주어지는 한 모든 분야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연예인'이 되고 싶은 건가.
"배우와 가수를 구분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무대에서는 멋진 노래와 퍼포먼스를 보여드리고 가수이고 싶고,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는 작품에 잘 녹아든 배우이고 싶다. 대중에게 어떤 이미지로 남겠다는 생각은 없다.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하자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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