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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탄생 100주년]미포만 백사장의 기적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2분 26초

"목선이나 만들라" 조롱받으며 1971년 영국행
열정·자신감 보이며 설득해 차관 도입 성공
기공식 27개월만에 74년 조선소·유조선 첫선
취소된 유조선으로 해운사 설립. 오일쇼크 극복


[아시아경제 송화정 기자]1974년 6월28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 겸 현대중공업이 만든 국내 최초의 26만t급 초대형 유조선 1, 2호선의 명명식이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 한 장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만 들고 특유의 불도저같은 뚝심으로 이뤄낸 위대한 성과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산 탄생 100주년]미포만 백사장의 기적 1971년 9월 영국 애플도어사와 조선소 건립에 관한 협의를 하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사진제공= 현대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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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주먹으로 백사장에 조선소를 세우다= 1971년 정 회장은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 조선소를 건설하기로 하고 영국 런던으로 날아갔다. 조선소를 건설하기로 했지만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은 황량한 백사장과 주위의 우려, 조롱뿐이었다. 당시 정부의 한 고위관료는 현대중공업이 조선사업을 하는 것에 대해 "현대가 조선사업에 성공하면 내가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로 우습게 여겼다. 정 회장은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목선이나 만들라"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실제로 당시 우리나라는 대한조선공사가 건조한 1만7000t급 선박이 최대였고 건조능력은 19만t에 불과했으며 세계 시장점유율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정 회장은 영국 최대 은행인 바클레이에 찾아가 4300만달러에 달하는 차관 도입을 협의했다. 당연히 바클레이측은 조선 능력과 기술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다. 바클레이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정 회장은 수소문 끝에 바클레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인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을 찾아갔다. 그러나 롱바텀 회장 역시 고개를 저었다. 상환 능력도 성장 잠재력도 의심스럽다는 이유였다. 이때 정 회장은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였다. 그 지폐에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다. 영국의 조선 역사가 1800년부터라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의 조선 역사가 300년이나 앞서 있는 것이다. 산업화가 늦어져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잠재력은 여전하다"


정 회장의 거북선 설득에 롱바텀 회장은 추천서를 써주었고 바클레이는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남아있었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는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영국 정부가 차관에 대한 보증을 해야하기 때문에 승인 기준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ECGD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선박을 구매할 선주가 있다는 증명이 필요했다.


정 회장은 이번에는 배를 살 선주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아직 조선소도 없는 상태에서 정 회장이 선주에게 내밀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 한 장과 5만분의 1 축척의 지도, 해외 조선업체가 만든 26만t급 유조선 도면이 전부였다. 당연히 배를 사겠다고 나서는 선주는 없었다. 선주를 구하지 못해 애가 타고 있던 정 회장은 그리스 선엔터프라이즈사의 리바노스 회장이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 회장은 즉시 스위스로 리바노스 회장을 찾아갔고 유조선 2척의 계약을 체결했다. 대형 유조선 2척을 수주함에 따라 ECGD의 승인을 받아 조선소를 짓기 위한 차관을 확보할 수 있었다.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와 정 회장의 뚝심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아산 탄생 100주년]미포만 백사장의 기적 1973년 3월 20일 현대울산조선소(현대중공업) 시업식에서 연설하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사진제공= 현대중공업)


1972년 3월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정 회장과 주한 각국 대사, 울산 시민 등 5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렸다. 정 회장은 기공식에서 세계 조선사상 전례가 없는 최단 공기(工期) 내에 최소의 비용으로 최첨단 초대형 조선소와 2척의 유조선을 동시에 건설하겠다는 사업계획을 밝혔다.


기공식을 한 지 2년3개월만에 정 회장은 건조 능력 70만t, 부지 60만평, 70만t급 드라이 도크 2기를 갖춘 국제 규모의 조선소를 만들어냈다. 이와 동시에 수주받은 2척의 유조선도 완성했다. 선박 건조 기간 동안 다섯 차례나 설계를 변경했던 리바노스 회장은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가장 잘 만들어진 배"라고 칭찬했다. 현대중공업은 첫 선박을 세계 최고 수준의 배로 만든다는 방침에 따라 건조에 필요한 기자재를 최고급품으로 구입해 사용했다. 1호선의 크기는 길이 345m, 폭 52m, 높이(갑판까지) 27m였다. 선 내에는 수영장을 비롯해 엘리베이터, 공기청정기 등이 설치됐고 기관실에는 시속 15.8노트(29.26㎞)로 달릴 수 있는 3만6000마력의 증기터빈을 장착했다.

[아산 탄생 100주년]미포만 백사장의 기적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이 최초로 건조한 1호선 애틀랜틱 배런호 명명식 (사진제공= 현대중공업)


◆위기를 기회로, 세계 1위로 우뚝서다= 뚝심 하나로 일어선 현대중공업은 성공적으로 세계에 데뷔했지만 다시 또 위기가 찾아왔다. 오일쇼크로 해운업과 조선업 경기가 얼어붙었고 현대중공업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선주들이 잇따라 주문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이에 정 회장은 역발상을 통해 위기를 돌파한다. 선주들이 취소한 배를 가지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정 회장은 선주들이 취소한 유조선 3척을 가지고 아세아상선을 설립, 해운업에 진출한다.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석유를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아산 탄생 100주년]미포만 백사장의 기적 1983년 선박건조 현장 프로펠러 위에서 작업을 하는 근로자를 격려하고 있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사진제공= 현대중공업)


뿐만 아니라 초대형 유조선 외에도 다목적 화물선, 벌크선, 목재운반선으로 선종을 다변화했으며 1975년에는 수리조선소인 현대미포조선을 설립한다. 이어 각종 육해상 구조물을 제작하는 철구사업부를 신설해 사업영역을 확대하는 등 오일쇼크로 닥친 위기를 극복해냈다.


현대중공업은 조선소를 준공한지 10년 후인 1983년 건조량 기준 처음으로 세계 조선업 1위에 올랐다.




송화정 기자 pancak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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