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 지난주 정치권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거취 문제로 시끄러웠다. 이슈는 국회법 개정안의 위헌 여부에서 새누리당 권력다툼 향배로 완전히 옮겨졌다. 전장이 바뀌면서 갑자기 할 일 없어진 야당은 두 거대 세력의 싸움을 싫지 않게 관망하는 모습이다.
◆6월 25일, 대통령의 선전포고…상대는 야당 아닌 친정 = 박 대통령은 25일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이 법은 무슨 법이며 왜 거부하나 = 관련기사 참조 : [원샷 이슈정리]朴대통령, 국무회의서 국회법 거부할까).
거부권 행사는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날 박 대통령의 셈법은 복잡했다. 박 대통령의 국무회의 주요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1)황교안 새 총리를 중심으로 부정부패를 해결하고 국가가 흔들리지 않도록 사명감으로 임해 달라.
2)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 이유 및 거부권 행사 천명
3)야당과 빅딜로 국회법 개정안에 합의하고 정부 입법은 통과시키지 못한 여당 지도부 비난
4)배신의 정치, 국민들이 심판해 달라
'6ㆍ25 선전포고'라고도 불리는 이 발언이 알려진 뒤 새누리당은 발칵 뒤집혔다. 의원총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고, 국회법 개정안을 폐기시키기로 결정하며 박 대통령 앞에 납작 엎드렸다. 반면 여야합의 법안이 대통령 한 마디에 헌신짝처럼 폐기되는 상황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은 의사일정 보이콧으로 맞섰다.
◆선전포고 하루 뒤…유승민의 응전(應戰) = 25일 새누리당 의원총회 결과는 국회법 폐기와 유 원내대표 재신임이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 전자는 당연한 것이고 후자는 황당한 것이다. 청와대는 즉각 "새누리당 지도부가 대통령의 발언을 안일하게 듣고 있다"고 불편해 했다. "그 정도 말했으면 알아서 나가라"는 게 청와대 뜻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날 유 대표는 공개 석상에 나와 "대통령이 국정을 헌신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일하고 있는데 여당이 충분히 뒷받침 하지 못해 송구하다. 박근혜 대통령께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말하며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깍듯한데 사퇴는 거부하는 유 대표의 의중을 놓고 많은 해석이 오가고 있다. 고개는 숙였으되, 대통령 뜻대로 당이 재편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직공'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그가 거부하는 박 대통령의 뜻이란 무엇일까.
◆임기 반환점은 차기 대선의 시작점? = "현 지도부와는 함께 갈 수 없다." 박 대통령의 의중은 한 마디로 이렇게 해석되는데, 현 지도부란 '비박근혜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원내 구성으로 보면 새누리당의 다수는 비박계다. 친박계가 소수이면서도 주도권을 잡아온 것은 박 대통령의 존재감 때문이다. 그런 박 대통령의 임기가 중반으로 넘어가고 있고 지지율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최저기록을 갱신한다.
박 대통령 취임 후 새누리당의 당권은 순차적으로 비박계로 넘어갔다. 국회의장, 당 대표, 원내대표까지 비박계가 접수했다. 박 대통령과 집권여당이 불협화음을 내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박 대통령의 선전포고는 이 구도를 역전시켜 내년 총선과 차기 대선에 대비하려는 사전정지 작업이란 게 대체적인 해석이다. 박 대통령 자신도 레임덕을 막기 위해 불가피한 전쟁을 치러야 할 시점인 것이다.
비박계가 앉아서 당하지 만은 않을 테니 무기도 필요하다. 여러 잡음을 감수해가며 공안검사 출신을 총리에 올려놓고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우는 것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는 목소리도 있다.
◆4일만의 함락이냐 선방이냐 내일 결판 = 친박계는 유 대표 사퇴를 안건으로 올리는 의원총회를 29일 개최하기 위해 28일 서명작업을 완료했다. 29일 오전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유 대표가 사퇴를 거부할 경우 이날 오후 의총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25일 대통령 발언 취지에 맞춰 원내에서 착착 행동에 나서고 있는 친박계에게 새로운 미션을 박 대통령은 29일 전할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다.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등 지도부에 대해 보다 강하고 명확한 '퇴진 지시'를 내놓을 지, 우회적 비판을 반복할 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러나 이 전쟁을 최대한 조기에 끝내야 하는 부담감은 박 대통령에게 있다. 결국 이번 이슈는 큰 그림에서 여당 내 권력다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쟁이 길어질수록 국민 여론은 악화될 것이며, 메르스 대처에 실패해 지지율이 취임 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박 대통령 입장은 난처해진다.
박 대통령과 친박계가 유 대표를 사퇴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선전포고 4일 만에 수도를 함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유 대표가 압박을 잘 버텨낸다면 시간은 유 대표편이다. 이 과정에서 유 대표는 여당의 차기 대선주자로 급부상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이를 막기 위한 카드를 이미 준비 중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상대의 항복을 이끌어낼 핵폭탄일 것이지만 핵폭탄은 쏜 사람도 다치게 한다.
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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