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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떻게 서울과 LA 거리에 이름을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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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도산 안창호 선생 77주기

[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과 청담동을 동ㆍ서로 연결하는 도산대로 . 왕복 10차선으로 강남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어 이 도로의 주변에는 최근에 뜬다는 '핫플레이스'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신사역에서 시작해 영동대교 방면으로 가다보면 좌측에 가로수길을 만날 수 있고 강남을지병원 사거리를 지나다 보면 각종 수입차 전시장이 위치하고 있어 이곳이 강남의 중심임을 실감케 한다. 도산공원 사거리와 학동사거리 인근은 이른바 '맛집'들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휘황찬란한 도시의 불빛들이 하늘을 수놓는 도산대로에서 압구정 로데오거리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강남 한복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고즈넉한 녹지, 도산공원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도산대로, 도산공원 등의 지명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지만 함께 떠올리지는 못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잠들어 있다.


그는 어떻게 서울과 LA 거리에 이름을 남겼나? 도산 안창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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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은 안창호 선생이 순국한지 77년이 되는 날이다. 정확히 77년 전인 1938년 3월 10일 안창호 선생은 옥고로 인한 병으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해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망우리에 안장됐다가 1973년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이장됐다. 때문에 매년 이날 도산공원에서는 선생의 추모식이 열린다.

도산공원이 만들어진 것은 1970년 3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1971년 서울시와 도산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착공을 하면서 서울시가 투입한 예산은 6000만원이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도산공원 주변이 서울 강남의 중심이지만 1960년대 말만 해도 이 지역은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968년부터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고 한남대교와 영동대교가 개통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영동대교가 도산공원이 문을 연 1973년 개통됐고 한남대교는 앞서 1969년 준공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도산공원이 들어선 자리는 지금과는 다른, 말 그대로 '허허벌판'이었던 셈이다. 도산공원의 역사는 서울 강남 발전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얘기다.


강남 노른자위 지역에 호를 남긴 선생은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1898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ㆍ정치 단체인 독립협회에 들어가 만민공동회를 열어 민족의 자주성과 국민 자각을 역설했다. 또 1907년에는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만들었으며 1909년엔 '청년학우회'를 세우는 등 청년운동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13년에는 '흥사단'을 조직해 민족 계몽운동과 국권회복 활동에 힘을 쏟았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를 맡으며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는 어떻게 서울과 LA 거리에 이름을 남겼나? 도산대로


그런데 선생의 호는 서울뿐만 아니라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도 남겨졌다.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고 앞서 2002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에 '도산 안창호 인터체인지'라는 표지가 세워진 것이다. 도산 안창호 우체국은 한인타운 6가와 하버드 코너에 위치한 '6가우체국'의 이름으로 미국 정부건물에 한국계 인사의 이름이 붙게 된 첫 사례였다.


이처럼 선생의 이름이 미국에도 남아 있는 것은 한인 이민사에 미친 영향 때문이다. 선생은 일찍이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돼 활동했으며 한일친목회를 공립협회로 재창립하고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또 1912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해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를 창간한 바 있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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