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지연진 기자]건강보험료를 매기는 기준을 뜯어고치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사실상 백지화됐다. 1977년 건강보험이 도입된 이후 처음으로 부과체계 손질에 나섰지만 연말정산 폭탄으로 여론이 악화되면서 논의 자체가 물 건너갔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염리동 건강보험공단 기자실을 방문해 "올해 중에는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선안을 만들지 않겠다"면서 "(개선안 논의를)연기해 충분히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건강보험은 현재 자영업자 등 지역가입자는 소득과 재산을 토대로 매겨지고, 직장인은 소득만을 기준으로 부과된다. 이 때문에 지역가입자 간 부과기준이 다른 데다 지역가입자가 직장가입자의 건강보험에 무임승차하는 등 부유층 피부양자가 많다는 지적이 많았다.
현재 건강보험에서 피부양자 규모는 전체 가입자의 40%(2023만명)에 달한다. 직장가입자가 1455만명(29.2%)으로 가장 적고, 지역가입자 1498만명(30.1%)이 뒤를 잇는다. 보험료를 내지 않고 건강보험 혜택을 받는 비율이 건보료를 부과하는 비율에 육박한 것이다.
이에 정부는 2013년부터 건강보험 학계, 연구기관 등 전문가들로 '건강보험료부과체계개선기획단'을 꾸려 소득 중심으로 부과체계를 단일화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송파 세 모녀 사건으로 저소득층 지역가입자에 대한 과도한 건보료 부과가 논란이 되면서 개편안 마련은 급물살을 탔다.
7월25일 첫 회의부터 지난해 9월11일까지 모두 11차례의 전체회의를 통해 직장가입자의 보수 외의 소득에 건보료 부과를 확대하고, 지역가입자 건보료 산정 기준에서 성·연령과 자동차 등을 제외하는 내용의 개편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복지부는 29일 건강보험 부과체계 개선단 최종 회의를 개최한 뒤 개선단에서 논의된 부과체계 개선안 7가지 모형을 공개할 예정이었지만 돌연 취소한 것이다. 문 장관은 "기획단에 마련한 개선안은 2011년 자료로 시뮬레이션(표본을 만든)한 것으로 정책으로 다듬기 위해선 폭넓은 검토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동안 기획단 논의 과정에서 2011년 자료인 것을 감안하고 개편안을 만든 데다 복지부가 3주 전부터 개편안을 공개키로 예정한 만큼 이 같은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최근 담뱃값 인상에 이어 연말정산 과정에서 증세 논란이 일면서 여론이 악화된 것을 우려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직장인들이 연말정산으로 세부담이 늘어난 데다 건강보험료까지 오를 경우 세수 확충을 위해 직장인들의 '유리지갑만 털어간다'는 비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까지 기획단에서 논의된 건보료 개편 방향대로 부과체계가 바뀌면 보수 외에 2000만원 이상의 추가 소득이 있는 직장가입자 26만3000세대(2011년 기준)는 월 평균 19만5000원의 건보료가 오르게 된다.
또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건보료를 한 푼도 내지 않던 사람 가운데에도 2000만원 이상의 총소득이 있는 사람 19만3000여명은 지역가입자로 전환돼 월 평균 13만원의 건보료를 새로 내야 한다.
반면 전체 지역가입자의 80%가량은 건보료가 내리게 돼 전체적으로 보면 인하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만 당장 건보료가 오르거나 내지 않던 건보료를 내야 하는 이 45만세대가량의 불만이 더 표면화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건보료가 오른 사람들은 보수 외 추가소득이 많은 '고소득 직장가입자'나 '고소득 피부양자'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여론 주도층이 많아 불만의 목소리도 커질 수 있다.
문 장관도 "(건보 부과체계가 개편되면)어느 계층에선 부담이 늘어나게 될 것"이라며 "개편안이 아무리 재정중립적으로 제도로 디자인해도 불가피하게 부담이 늘어나는 계층은 불만이 있을 것이다. 이들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시인했다.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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