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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달에 선정된 호국인물 이익수 장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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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달에 선정된 호국인물 이익수 장군은 이익수 육군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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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새해 첫 달인 1월의 독립운동가에 황상규 선생이, 1월의 6ㆍ25전쟁영웅으로 김홍일 육군 중장이, 1월의 호국인물에 이익수 육군준장(사진)이 각각 선정됐다.

국가보훈처는 의열단을 조직한 황상규 선생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경남 밀양 출신인 선생은 10대 말부터 노동 야학과 사립학교 교사를 역임하다가1913년 이후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결사에 가담해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1919년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 및 조선독립군정사 조직에 참여해 재무책임자가 되었고, 처조카인 김원봉과 함께 청년결사대 조직인 의열단을 창단했다. 국내에 있는 일본기관의 총공격에 직접 참여하려고 거사를 준비하던 중 1920년 일제에 체포되어 7년 징역형을 받았다. 1926년 출옥한 선생은 밀양의 지역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밀양지회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재직했다.

1929년 6월 신간회 중앙본부의 의결기구 및 집행부 간부가 되어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고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정한 1월의 6ㆍ25전쟁영웅 김홍일 육군 중장은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출생해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0년 중국 귀주강무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했다.


1944년 중국청년군사대리참모장을 지낸 다음 1945년 4월 한국광복군 참모장이 되어 항일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장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는 등 독립군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8년 8월 귀국하고 나서는 국군에 입대해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제1군단장 등을 지냈다. 6ㆍ25전쟁 당시 풍전등화의 조국을 지켜내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장군은 후퇴하던 국군을 결집해 3개의 혼성사단을 편성하고 나서 한강 이남에 24km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을 저지하기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다. 제1군단장에 오른 장군은 한강 방어선이 붕괴한 후 금강과 소백산맥 일대에 새로운 저지선을 형성해 진천 남쪽 봉화산, 문안산 일대에서 전차와 포병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사단의 남침을 닷새 동안 저지했다.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 방어에 돌입하고서는 기계-안강-영덕-포항 일대에 침공해온 북한군을 상대로 역습 포위작전을 전개해 격퇴했다. 이 전투로 제1군단은 기계와 포항지역 북방으로 후퇴한 북한군을 추격해 다음 단계의 반격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육군종합학교 총장으로 취임해 전시에 급격히 소요가 증대되는 육군 간부의 양성에 전념하다가 1951년 3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부하를 사랑하라. 재물을 탐하면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잃을 것'이란 신념을 후배들에게 가르쳤다. 정부는 1956년 태극무공훈장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각각 수여했다.


전쟁기념관이 선정한 1월의 호국인물인 이익수 육군준장은 1ㆍ21사태 당시 무장공비를 소탕하고 전사한 영웅이다.


1923년 10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이 장군은 공주농업학교와 경성법정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10월 소위로 임관했다.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공비토벌작전, 소작봉 전투와 600고지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웠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미 8군사령관인 밴 플리트 장군으로부터 직접 미국 은성훈장을 받았다.


전쟁 이후에는 수사사령부 감찰부장과 육군본부 감찰감실 조사계장, 강원병무청장 등을 역임했다. 1967년 7월 1사단 15연대장으로 부임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정찰국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자 장군(당시 대령)은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즉각 투입되어 도주로 차단과 격멸작전을 전개했다.


사흘 뒤 장군은 양주군 노고산에 침투한 무장공비 3명을 발견, 도주로를 차단하고 노고산 일대를 포위하고 나서 공비 1명을 사살했다. 나머지 2명을 생포하기 위해적 은신처 20여 미터까지 접근해 귀순을 권고했으나 불응했다.


장군은 귀순 권유에도 응하지 않자 사살하기로 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려는 순간 무장공비의 갑작스러운 소총 난사로 전사했다. 그의 전사 소식을 들은 15연대 부대원들은 필사적인 공격을 감행해 공비 2명 모두를 사살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 등을 추서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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