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 공직자 인사검증과 감찰이란 중책을 맡았던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은 자신이 휘두르던 칼의 방향을 청와대 쪽으로 돌렸다. 3대 국정기조 중 하나인 '문화융성' 정책을 책임지던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도 이 대열에 가세했다. 전 참모와 각료가 현직 대통령과 맞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문체부 실무자 인사를 직접 지시했다는 의혹과 관련, 유 전 장관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그런 의혹이 사실에 가깝다고 증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해당 국ㆍ과장은 정윤회씨 부부가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는 체육계 비리와 관련된 조사를 진행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정씨 부부의 생각과는 다르게 나왔고, 이런 불만이 청와대에 전달된 뒤 박 대통령이 유 전 장관을 불러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하며 국ㆍ과장 경질을 직접 지시했다는 의혹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박 대통령이 사적 인연에 의해 실무 공무원 인사까지 챙긴 셈이고 정씨가 국정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증언은 거짓이 된다. 무엇보다 '비선정치'는 없다던 박 대통령 발언도 신뢰를 잃게 된다.
유 전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대충 정확한 정황 이야기"라며 이 같은 의혹을 확인했다. 정씨가 청와대 실세 비서관 등 이른바 '십상시'와 정기적으로 만나 국정에 개입했다는 문건이 공개되면서 시작된 논란이, 박 대통령의 문체부 국ㆍ과장 경질지시라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윤곽을 드러내는 중대 발언인 것이다.
청와대는 유 전 장관의 발언이 보도된 5일 오전 아무런 입장을 내지 않았다. 그러다 오후 늦게 돼서야 민경욱 대변인은 춘추관을 찾아와 "사실과 다르다"는 취지의 해명자료를 읽었다. 민 대변인은 "박 대통령이 유 장관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체육계 적폐 해소에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고 이에 따라 유 장관이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사 조치를 단행한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박 대통령은 민정수석실로부터 체육계 적폐 해소가 더딘 이유는 실무 공무원들의 소극적 대처 때문이라는 보고를 받고, 이 같은 내용을 유 전 장관에게 전했으며, 이에 유 전 장관이 직접 해당 국ㆍ과장에 대한 인사조치를 했다는 설명이다. 유 전 장관과 청와대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 유 전 장관은 6일까지 청와대 설명에 대해 재반박하지 않았다.
유 전 장관은 지난 7월 공직을 떠났는데, 당시 박 대통령의 인사 지시에 불응하다 경질됐다는 설이 많았다. 인사문제를 두고 청와대와 충돌한 정황이 분명하고, 그가 공직을 떠난 뒤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당시 관측은 어느 정도 맞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유 전 장관이 재반박 등을 통해 박 대통령과 정씨 부부의 인사청탁 고리를 분명하게 증언한다면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최대 위기에 몰릴 수 있다. 검찰이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의 진위 여부를 수사하고 있지만 그 결과를 기다릴 필요도 없게 되는 셈이다.
5일 검찰조사를 받은 조응천 전 비서관이 '정윤회 국정개입'의 증거를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는가도 관건이다. 앞서 그는 "60% 정도 맞는 이야기"라며 문건에 나오는 내용 중 절반 이상이 사실임을 암시했다. 문건에 등장하는 정씨와 청와대 실세 비서관 3인 등은 모두 '허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검찰은 이번 주 중 정씨를 소환해 조사할 예정이다.
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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