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 며칠 전 독일산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에 가입한 것은 딱히 검열이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평범한 기자의 '카카오톡'에는 검찰이나 경찰이 뒤져서 건질 만한 내용도 없다. 텔레그램이 연일 화제에 오르니 어떤 서비스인지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다.
텔레그램에 접속했다. 낯익은 이름들이 꽤 많이 보였다. 전체 연락처 중 20%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데 어찌 알았는지 "망명을 환영합니다"라는 지인들의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청와대 출입기자마저 망명을?"이라며 놀라워했다. "헐, 괜한 오해 사게 생겼네" 곤혹스러움이 잠시 밀려왔다. 가입 4일째, 기자의 휴대폰 속 망명객은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직급이 꽤 높은 청와대 직원들의 이름도 보인다. 기자처럼 그저 호기심에서였으리라.
메신저로서 텔레그램은 꽤 쓸 만했다. 망명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당분간 카톡과 병행해 이중국적자로 살게 될 것 같다. 조사에 따르면 9월말의 하루 평균 카톡 이용자수는 40만 명 정도 줄고 텔레그램 가입자는 50만 명 정도 늘었다고 한다. 카톡 이용자수가 2606만 명에 달하니 아직은 새발의 피일지 몰라도 앞으로 이런 추세는 거세질 게 분명해 보인다.
망명객들로부터 망명사유를 들어봤다. "그들이 보겠다면 볼 수 있다"는 사생활 노출 걱정이 많았지만 한국의 대표적 창조경제 기업에게 보란 듯 타격을 주겠다는 심리도 있는 것 같았다. 창조경제를 핵심 국정과제로 삼고 있는 박근혜정부가 제 발등을 찍는 모습을 보겠다는 소심한 저항심이다. 어쩌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이 정도로 떨어진 것인지 마음이 착잡하다.
사이버망명을 야당 성향 일부 젊은이들의 치기 또는 사생활 노출에 대한 필요 이상의 과잉반응 정도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그들의 결정에 심적으로 동조하게 만드는 많은 요인들이 우리 주변에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월호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에 의혹을 제기한 일본 신문기자는 한국 검찰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 당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기사 속 의혹의 사실 여부보다, 현 정부가 견지하고 있는 정권 비판에 대한 수용범위의 협소함이다. 산케이신문 기사에 대해선 청와대 대변인의 비공식 유감 표시 정도면 될 법한 일이었다. 법적대응은 다소 과도한 측면이 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수사기관이 내 카톡을 들여다볼까 두려워 사이버망명을 해야 하고, 권력에 대한 언론의 감시와 비판 기능을 심각하게 위축시키는 지금의 사회 분위기는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누구든 끌려갈 수 있다"는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암울함과 매우 닮았다. 대통령 측근이 시장인 도시에서 벌어진 영화 다이빙벨 상영금지 논란 역시 연장선에 있다.
일본 기자에 대한 기소 결정으로 한일관계가 더 악화될지 모른다는 걱정도 나온다. 그보다는 피해의식, 자기검열, 상호감시와 같은 어두운 단어들이 우리 곁을 다시 맴돌기 시작했다는 게 더 가슴 아프다. 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국민들도 이런 세상을 꿈꿨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 전 또 다른 청와대출입기자 한 명이 텔레그램에 가입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그에게 "망명을 환영한다"고 보내야 할지 고민스럽다.
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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