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여섯 번째 경기가 열린 10일 창원실내체육관. 종료 1분을 남기고 울산 모비스는 위기를 맞았다. 74-71로 앞섰지만 주포 문태영(36)이 5반칙 퇴장을 당했다. 함지훈(30)이 발목 부상으로 코트를 떠난 지 2분도 지나지 않아 생긴 악재. 유재학(51) 감독은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팔짱을 끼고 조용히 코트를 응시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 선수들에게 경기를 맡겼다. 제자들은 믿음에 보답했다. 이대성(24)은 자유투 4개 가운데 3개를 넣었고, 로드 벤슨(30)은 데이본 제퍼슨(28)의 거듭된 골밑슛을 가로막았다. 천대현(30)까지 가로막기 행렬에 가세한 모비스는 결국 79-76으로 이겼다. 4승 2패로 2년 연속이자 통산 다섯 번째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뤘다.
▲명문구단으로~
“아, 이번에는 정말 안 될 줄 알았는데 됐네요.”
경기 직후 유재학 감독은 눈물을 보였다. 한동안 우승을 믿지 못했다.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환호를 받고서야 빙그레 웃었다. 시즌 전 그가 예상한 모비스는 6강 전력이었다. 우승은 꿈도 꾸지 못했다. 유 감독은 “다른 구단의 신인과 외국인선수들의 기량이 좋아져 이번에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정규리그에서 40승(14패)이나 할 줄 몰랐다”고 했다. 2006-2007시즌에도 그랬다. 열악한 전력을 딛고 모비스를 통합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에도 특출한 선수 없이 팀을 상위권에 올려놓았다. 그가 맡기 전까지 모비스는 실업 최강이던 전신 기아자동차의 역사를 잇지 못한 최하위 팀이었다.
▲‘나’보다 ‘우리’
벤슨은 경기 종료 4초를 남기고 덩크슛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체육관을 가득 메운 LG팬들은 그대로 짐을 쌌다. 골대 뒤의 모비스 팬들은 부동자세로 벤슨을 연호하며 기뻐했다. 승리가 확정된 뒤에는 다른 이름을 외쳤다. “만수(萬手)! 만수!” 다양한 전략을 구사해 붙은 유재학 감독의 별명이다. 수많은 구상에는 전제가 붙는다. 하나로 뭉친 선수들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2004년 모비스를 맡은 이후 10시즌 동안 선수단, 프런트와 아침식사를 함께 할 정도다. 외국인선수도 예외가 아니다. 유 감독은 “하루를 함께 시작하며 단합할 수 있다. 컨디션을 저해하는 늦잠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유기적 결합을 강조하는 팀 특성상 특별대우를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혼혈 귀화선수 문태영은 입단 초 잦은 지각으로 곤욕을 치렀다. 유 감독으로부터 ‘퇴출’ 소리까지 들었다. 용서를 빌어 겨우 복귀한 문태영은 이번 무대에서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6경기에서 평균 22.2득점 8.0리바운드로 맹활약했다. 유 감독은 “다소 산만하지만 코트에서만큼은 집중력이 굉장히 좋은 선수”라고 칭찬했다.
▲희생정신의 가치
우승에 취한 모비스 선수들은 유재학 감독을 둘러싸고 헹가래를 했다. 김재훈(42), 조동현(38) 코치의 몸도 공중을 날았다. 고조된 분위기에서 두 선수는 통증을 숨기려고 애썼다. 함지훈과 이대성이다. 함지훈은 종료 2분57초 전 제퍼슨의 슛을 가로막다 발목을 다쳤다. 이대성은 2월16일 안양 KGC인삼공사와의 원정경기에서 다친 발목이 낫지 않았다. 그럼에도 17분5초를 뛰며 끈질긴 수비로 LG 주포 문태종을 괴롭혔다. 2쿼터까지 무득점으로 막기도 했다. 함지훈도 6경기에서 평균 11.7득점 3.0리바운드 5.2도움으로 우승에 힘을 보탰다. 둘은 신인 드래프트 10순위와 11순위 출신이다. 유 감독은 두 선수를 선발하며 “확실한 장점 하나만 키우면 된다. 특히 수비는 재능과 상관없다. 반복 훈련이 답이다”라고 했다. ‘우리’를 배우며 성장한 두 선수는 팀워크와 희생정신의 가치를 우승으로 증명해보였다.
▲‘우승제조기’
“커팅 안 해도 돼. 매번 한 건데 뭐.”
유재학 감독은 우승 세리머니인 그물 커팅을 하지 않았다. 곧장 기자회견실로 들어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취재진에 대한 배려였다. 그라서 부릴 수 있는 여유이기도 했다. 챔피언결정전 우승이 벌써 네 번째다. 세 차례의 신선우(58ㆍ전 현대-KCC), 전창진(51ㆍKT) 감독을 넘어 역대 최다우승 감독이 됐다. 모비스 지휘봉을 잡은 2004-2005시즌 이후 10시즌 만에 이룬 대업으로 재임기간으로 한정하면 우승 확률은 40%나 된다. 비결로 유 감독은 세 가지 요소를 꼽는다. 감독의 열정과 적재적소의 선수, 프런트의 지원이다. 신뢰와 소통으로 그는 삼박자를 아울렀다. 팀을 처음 정상에 올려놓은 2006-2007시즌부터는 하나를 더 추가했다. 절실함이다. 유 감독은 “배가 불러 느슨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선수들은 이를 잘 알고 있다. 유 감독은 시즌 전 국가대표를 맡아 3개월여 동안 사령탑을 비웠다. 그럼에도 비시즌 훈련은 이전과 똑같이 진행됐다. ‘우리’로 묶인 선수들이 솔선수범했다. 유 감독이 10년 동안 심은 시스템은 어느덧 팀의 소중한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덕에 그는 경기 종료 1분 전 코너에 몰리고도 선수들에게 경기를 맡길 수 있었다. 유 감독은 “힘든 시간을 함께 하고 어려움을 이겨준 선수들에게 너무 고맙다”고 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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