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는 30년 넘게 취재기자를 하면서 운동선수의 연애 기사를 써 본 적이 없다. 딱 한번, 결혼 기사를 단독 보도한 적은 있다. 1980년대 후반 어느 날, 유도 대회가 열리고 있는 경기장에서 그 무렵까지는 이름이 꽤 알려져 있던 양궁 선수 서향순(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금메달)이 국가 대표급 유도 선수와 결혼한다는 얘기를 귀동냥했다. 곧바로 ‘안테나’를 세웠고 여기저기에 알아본 결과, 서향순과 화촉을 밝힐 예비 신랑이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유도 86kg급 금메달리스트 박경호라는 것을 확인했다. 다음 날 글쓴이가 일하는 신문 1면에는 두 선수의 결혼 예정 기사가 실렸다. 지난해 박지성-김민지, 최근 김연아-김원중 커플만큼의 반응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종목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큰 화제가 됐다.
그 무렵 유명 운동선수의 연애와 관련한 잊지 못할 일화가 있다. 1987년 2월 뉴델리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는 이듬해인 1988년 서울 올림픽에 탁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있기도 했거니와 기자들도 올림픽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신문과 방송 등 국내 거의 모든 매체 기자가 나서서 취재 경쟁을 벌였다. 방송사의 경우 밤 9시 뉴스가 한국 선수들이 출전하는 주요 종목 경기 시간과 겹쳐 기자들이 몇 십 분씩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신문기자들의 원성을 산 건 당연했다.
그 대회에서는 한국 선수들의 성적보다 더 중요한 기사거리가 있어서 김포국제공항을 떠날 때부터 기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방심하는 순간 크게 물을 먹을 수 있는 대형 특종 후보였다. 게다가 글쓴이는 탁구 담당 후배 대신 출장길에 나선 터였다.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안재형과 자오즈민이 어쩌면 몇몇 기자가 경위서를 써야 했을지도 모를 주인공이다. 당시 안재형은 22살, 자오즈민은 24살이었다. 둘은 대회전부터 주요 국제 대회에서 만나며 사랑을 키우고 있었다. 당시 한국과 중국 탁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둘이 사귀고 있다는 말이 조금씩 돌고 있었다. 청춘 남녀가 사랑하는 건 좋은 일인데 당시 두 나라는 미수교 상태였다. 한때 총부리를 겨눴던 사이였기에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둘의 미래를 걱정했다. 탁구 담당 기자들은 이런 내용을 꿰고 있었다. 쓰지 않고 있었을 뿐.
개막 하루 전, 대한탁구협회 관계자의 대회 관련 브리핑이 있었고 이어서 취재 기자단의 간략한 모임이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대회 기간 절대로 안재형-자오즈민 관련 기사를 쓰지 말자’는, 요즘 말로 통 큰 결정이 내려졌다. 글쓴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까딱 잘못하면 덤터기를 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특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툭 하면 엠바고를 깨는 기자들이 이 대회에서만큼은 철저하게 약속을 지켰다는 것이다. 보도 이후 이어질 여러 문제에 대해 모두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안재형과 자오즈민은 대회 기간 내내 서로에게 눈빛 한번 주지 않았다. 그 뒤로 진행된 둘의 사랑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어 생략한다. 1989년 둘의 결혼 사실이 ○○일보에 특종으로 보도됐을 때 경위서를 쓴 기자는 글쓴이도 뉴델리 대회 때 탁구 담당도 아닌, 어느 선배 기자였다. 덤터기가 돌고 돈 꼴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운동선수들의 연애 기사는 신문이나 방송의 보도 영역 밖이었다. 글쓴이를 비롯해 연애 사실을 알고도 쓰지 않은 기자들이 대부분이기도 했고. 1970년대 연세대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야구 선수 최동원도 그랬고, 1980년대 최고의 유도 스타였던 하형주도 그랬고 가십을 다루는 주간지에만 이따금 연애 관련 기사가 실렸다.
특히 여자 선수들의 경우, 연애 기사는 금기시됐다. 기사가 터지면 먼저 감독에게 혼쭐이 나고 선수 활동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받았다. 몇몇 감독은 기자들에게 “아, ○○ 녀석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어”라고 하면서 팀 내 특정 선수의 연애 소식을 슬쩍 흘리기도 했다. ‘궁금해 하니 알려 주는데 알고만 있지 쓰지는 말라’는 협조 요청이었다. 그 무렵 연애가 운동의 적이라는 생각은 종목을 막론하고 지도자들 사이에 뿌리가 깊게 박혀있었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고 운동선수들도 사랑을 드러내 놓고 할 수 있게 됐다. 남자 선수의 여자 친구는 내조한다고, 여자 선수의 남자 친구는 외조를 한다고 얘기한다. 그래도 운동선수가 운동 외 일로 신문과 방송 그리고 인터넷 등에 오르내리는 건 썩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이건 기자들이 협조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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