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상머슴만 남았다
[아시아경제 최창환 대기자] 영화 '겨울왕국(Frozen)'이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을 받았다. 단순히 영화제작자와 작곡가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 게 왔다. 겨울왕국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항복선언, 여성 시대에 대한 헌정품이다. '렛잇고(Let it go)'는 여성의 승리행진곡이다.
할리우드는 문학, 신화, 음악, 미술, 과학, 기술 등 모든 것을 녹여낸다. 영화는 종합 예술상품이다. 이 판의 주류는 마초다. 여주인공은 대부분 말썽꾼이다. 도망가다 넘어진다. 뜬금없는 오해로 남자주인공을 곤경에 빠트린다. 좋은 남자 만나 팔자 피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팔아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할리우드가 디즈니를 통해 '주체적인 여성'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제는 네 세상"이라고.
엘사는 노래한다. "아 놔(let it go), 착한 소녀는 더 이상 없어. 나 눈부신 이 겨울왕국에서 살거야." 애들이 부모 말 안 듣고 "내 뜻대로 살래"라고 외치는 영화는 부지기수다. 대부분 남자애들이 나서고 여자애들은 "맞긴 한데"라고 망설이다 따라나선다.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은 기억하면서 여주인공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다. 겨울왕국은 거꾸로다. 엘사와 안나 두 자매만 있을 뿐이다.
미국 여류 저널리스트 해나 로진은 "여성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책이름이 '남자의 종말(The End of Men)'이다. 겨울왕국에서 남자는 끝났다. 나쁜 남자래봤자 왕위를 노리는 찌질한 왕자와 돈만 밝히는 상인이다. 어리숙한 얼음장사와 눈치보는 집사가 착한 남자다. 엘사와 안나 두 공주의 힘과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다. 여성들의 운명을 결정했던 왕자님의 키스와 유리구두는 사라졌다. 드림웍스가 슈렉의 못생긴 공주님을 통해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반기를 든 이후에도 철저히 남성중심주의를 고수했던 디즈니가 드디어 항복했다.
디즈니의 항복선언에 한국이 1000만 관객으로 환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엘사와 안나가 진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여자는 골프도 잘 치고 스케이트도 잘 탄다. 사시, 행시, 외시의 수석과 상위 성적을 여성들이 도맡아 한다. 별다른 뉴스도 아니다. 사관학교의 수석도 여학생 몫일 때가 많고 학군단(ROTC) 1등도 여대 학군단이 차지한다. 기자시험도 마찬가지다. 한국 남자는 대통령 자리만 넘겨준 게 아니다. 여자는 진작부터 준비해왔다.
우리가 들고 있는 가부장제의 깃발은 찢어져 흘러내린다. 성문 앞에는 여성군단이 '가모장제'의 깃발을 들고 '렛잇고'에 발맞춰 행군하고 있다. "모계사회가 왔다는 증거야." 영화관을 나서는 나의 독백에 대학 졸업반인 아들이 픽 웃는다. "여자애들 진짜 열심히 해요"라고 한다. 젊은이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해나 로진은 섹스에 주도적인 여성의 등장과 힘보다는 의사소통 능력과 집중력이 필요한 서비스산업으로의 경제 환경 변화를 여성이 약진한 이유로 들었다. "남자는 변화하기를 거부하며 종말을 재촉한다"고 분석했다.
중년남자들의 분석은 영 시원찮다. 몇 명이 여성의 약진이유를 분석해 봤다. 드라마작가 대부분이 여자라 드라마가 여성편향적인 악영향을 줬다는 설명. 내신을 중시하는 입시제도가 여성에게 유리하다는 분석. 아줌마들이 "고놈 고추 참 이쁘다"며 만질 때 저항하지 않아 물건이 고추로 비하됐다는 남근숭배정신의 퇴조란다. 그나마 남아있는 '고추'마저 아까운 기상천외한 답변을 용케도 생각해 낸다.
그러다 보니 민망한 일이 자꾸 벌어진다. 국방부, 육사, 공사 이렇게 3곳에서 같은 뉴스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수석졸업자를 뽑는 방법을 바꾸고 ROTC 1등 학교를 뽑지않겠다는 내용이다. 체력을 중시하는 쪽으로 평가를 바꾼다는 후속기사가 나왔다. 여성이 남성을 앞서는 게 불안하다. 군인 탓할 일이 아니다. 영업이나 취재는 남자가 유리하다는 이유로 기업과 신문사도 비슷한 일을 해왔다.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중년 남성들이다. 의견일치가 어려운 앙숙들도 맞장구를 치며 동조한다. 남성중심사회가 무너지는 데 따른 불안감이 똬리를 틀고 있다.
나도 맞장구치며 이런 일을 함께했다. 남자로 태어나 살아왔고 아들만 둘인데 당연하다. 그런데 서로 힘들다. 힘으로 누르면 힘으로 밀고 온다. 여성들은 직장에서 유리천장 때문에 어렵고 가정과 직장을 병행해야 하는 슈퍼맘 신드롬으로 괴롭다. 남자들은 명실상부가 아닌 '명실따로' 때문에 힘들다. 말만 가장이지 갈수록 '가장부'다. 직장과 가정 양쪽에서 머슴 취급받는다. 이런 상머슴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해답이 있다. 여자들에게 무릎 꿇고 투항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중년 남자들 쉽게 변하기 힘들다. "야 여자한테 잘해야 해"라고 말하면서 속으로 '스벌' 하는 게 중년 남자들이다. 차근차근 해야 한다. 일단 자기 기부터 살리고 시작해보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 일단 꿈틀부터 하자. 그런데 해답이 뭐냐고? 그놈의 조급한 성미부터 고쳐야 한다.
최창환 대기자 choiasi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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