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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을 마치며]김영현 "다시 그들을 위한 얘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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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을 마치며]김영현 "다시 그들을 위한 얘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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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김영현 작가(60)가 지난 27일 일년간 진행한 아시아경제신문 연재소설 '짐승들의 사생활'을 끝마쳤다. 김 작가는 제일 먼저 "마지막 퇴고를 하고는 마당으로 나와 '만세'를 불렀다"는 말로 그간의 소회를 털어놨다. 연재가 진행되는 동안 김 작가는 경기 양평 용문도서관에 틀어 박혀 글감옥 속에 살았다.

'짐승들의 사생활'은 개발, 폭력, 세대간 갈등이라는 다소 어두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소통하고 연대하며 새로운 희망과 삶을 추구해가는 주인공들을 그렸다. 소설은 '살구꽃 마을'을 배경으로 하림, 동철, 혜경, 소연 등 20, 30대의 젊은 주인공들과 기성세대인 지역 정치인, 개발업자, 펜션 주인 등이 뒤섞여 욕망의 서사를 이룬다. 그 안에는 굴절 많은 삶, 한국 현대사의 폭력, 젊은 세대의 희망이 거세된 현실, 개발 이익을 탐닉하는 공동체 사람 등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 요지경처럼 펼쳐진다.


김 작가가 집필하는 동안 박건웅 화백이 삽화를 담당했다. 캐롤이 울려 퍼지는 송년 직전, 김 작가와 박 화백을 충무로 민속주점에서 만났다. 연재 후일담, 집필 과정과 주인공의 삶들에 나타난 우리 시대의 모순을 다시금 되짚어보기 위해서였다.

오랫만에 만난 김 작가의 행색은 영락없이 수행자 같았다. 회색 개량 한복을 입은 모습은 충무로처럼 번화한 도시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40대를 무색케 하는, 시골청년같이 순박한 인상의 박 화백과도 마치 스승과 제자처럼 이질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연재 기간 내내 동안 찰떡궁합을 이뤘던 것과는 전혀 딴판. 하지만 대화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정겨웠다.


김 작가는 "허구로써 진실을 말해야 하는 창작자의 고뇌가 여러 차례 절망에 빠뜨렸다"며 "중간에 전화해서 중단을 요청하고 싶은 마음이 여러번 들었다"고 토로했다. 이에 박 화백은 "지난 일년간 고통과 행복을 함께 맛봤다"며 연재의 어려움을 드러내면서 한동안 소설속의 배경과 주인공에게 사로잡혀 있을 것 같다고 응답했다.


다시 김 작가는 "두세번 고비가 있었다. 그 때마다 참담해서 잠을 못 이뤘다"며 창작의 고통을 내비쳤다.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다. 김 작가는 "집필 중반부터는 온 몸이 충전된 듯 주인공들이 잠든 나를 깨워 책상 위로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막걸리 몇 잔 돌자 이들은 최근 고려대생이 내놓은 '안녕하십니까 ?"라는 대자보에 관한 얘기로 화제를 옮겨갔다. 김 작가는 "일상 언어로 대중에서 말 걸기를 시작한 대자보 신드롬은 오늘날 우리들에 취해야할 소통의 자세를 다시금 보여 준다"며 "88만원 세대가 자각하고 진화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소설도 결국 사람 사는 얘기를 통해 독자와 소통하고 교감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인터넷 세대인 젊은이가 기성세대의 소통수단인 대자보로 우리 사회에 나즈막하고 차분한 말 걸기를 시도한 것은 새로운 소통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했다. 결국 이번 소설에서 젊은 세대가 소통, 희망을 얘기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이번 소설은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일상언어로 아주 편안하게 썼다. 그 전에는 악인은 모두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보였다. 상처 입은 사람을 보면서 그들마저 껴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단죄는 소설가의 몫이 아니다. 비록 허구일망정 그 또한 주인공들이 판단할 노릇이다. 이제 비로소 세상에 대한 분노와 바로 맞설 수 있게 됐다. 이전과 내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내 스스로 찾아낸 것이 이번 소설이 아니었으면 갖지 못 할 행운이다."


이어 김 작가는 "어느 덧 어른으로 장성해서 삶의 배경이 달라진 형, 누나들에게 선뜻 소설을 건네기가 두렵고 힘들어 지금껏 한 권도 못 줬다"며 개인적인 아픔을 고백했다. 대학시절 고문과 투옥, 민주화운동, 창작 및 문단 활동 등 삶의 과정에서 쓰여진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멀고 먼 해후', '폭설' 등 예전의 소설 속에는 폭력, 분노, 투쟁의 거친 언어가 점철돼 있다. 김영현은 경남 창녕 출신으로 위의 형, 누나들과는 세대가 다를 만큼 나이 차이가 난다. 그런 까닭에 선뜻 고통의 언어를 함께 나누자고 손을 내밀 수 없었다고 터놓았다.


"나 역시 주인공들이 자신의 희망을 찾아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희망을 찾는 작업은 인간 본성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 비로소 단행본이 출간되면 꼭 형들에게도 권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밤이 깊어지고, 거리에 사람들이 줄어들 무렵 우리는 자리를 옮겨 소통의 절실함에 대해 얘기를 이어갔다. 그러고 보면 김 작가는 세상과도 무던히 소통을 시도해 왔다. 일년 전 대선 직후 칩거중인 경기 양평에서 만났던 소설가 김영현은 세상과의 절연, 분노를 얘기하며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고, 버리려해도 버려지지 않는 세상에 말문을 열 수 없어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리곤 신문 연재를 통해 말문을 여는 것을 한참이나 주저하기도 했었다.


"여러 주인공들과 대화하며 나의 말문도 열렸다.구호도 아닌, 울분도 아닌, 그저 아픔과 상처를 가진 사람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결국 따뜻해질 수 밖에 없더라. 서로 사람끼리 어루만지며 희망를 발견해 가야만 세상이 바뀐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소통은 소설 속 주인공들, 현실의 각 세대들, 가족들간에 그 형태가 달라도 같은 해법을 지니고 있다. 상처를 드러내는데서 시작된다. 아직 소설 속에서 다 하지 못한 얘기들이 남아 있다. 다시 그들을 위한 얘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한편 지난 일년, 그새 김영현은 철학 에세이 "그래 흘러가는 시간을 어쩌자구"를 완성, 내년 1월 사회평론 출판사를 통해 내놓을 예정이다. 김영현은 소설과 철학 에세이를 동시에 작업한 이유에 대해 "철학 에세이는 죽음에 관한 명상이다. 이미 3년전부터 써왔다"고 설명했다. 그리곤 또 다른 철학서 집필 작업에 돌입해 있다.


박 화백도 동화집 '호랑이'(보리 출간)를 완성하고, 고 김근태 선생의 일대기에 대한 만화작업도 마무리단계에 들어갔다. 내년 초 프랑스 등 유럽에서 동시 출간할 계획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화폭에 담아온 박 화백은 "짐승들의 사생활이라는 소설을 통해 우리 시대의 상처와 상처 입은 사람들이 극복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며 "지난 일년동안 신문연재 삽화라는 색다른 경험을 통해 한 단계 성숙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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