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구니 안의 사과 한 알이 썩었다. 이 바구니 안에는 썩은 사과와 온전한 사과가 섞여 있다. 어떤 사과가 썩었는지는 육안으로 구별 가능하지만, 전염이 됐는지 여부는 사과를 잘라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고 가정한다. 바구니 안의 사과를 안전하게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몇 가지 옵션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썩은 사과를 포함해 썩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주변의 사과까지 광범위하게 폐기처분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어찌 보면 가장 간단하고 명료한 듯이 보이지만, 이 방식은 상당한 비용을 수반한다. 때에 따라선 사과바구니를 통째로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다음으로는 썩은 것으로 확인된 사과만을 골라내는 것이다. 육안으로 구별 가능하니까 썩은 사과를 고르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 이 방식 역시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속으로 곯은 사과를 그대로 방치할 수 있다. 이런 사과는 나중에 문제를 일으켜, 결국은 바구니 안의 사과 전체를 망칠 수 있다.
"썩은 사과 한 알이 바구니 전체의 사과를 망친다"(사과에서 분비되는 식물 호르몬 에틸렌의 영향으로 실제로 그렇다고 한다)는 이른바 '썩은 사과 이론'은 전통적인 산업조직론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가설이다. 그러나 요즘은 조직론 뿐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에서 폭넓게 적용되는 추세다.
최근 동양사태의 후폭풍으로 금산분리(산업자본의 금융회사 보유지분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정치권이 당장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고, 일부 경제관료들도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은 "금산분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이번 동양그룹 사태의 교훈"이라며 "계열사 간에 부실 위험이 전이되지 않도록 하려면 지주회사제도 개선을 통해 금융 계열사와 비금융 계열사 간 분리장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요는 "동양증권이 동양그룹이라는 재벌의 사금고 역할을 했고, 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선 보다 강력한 금산분리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양증권이 계열 동양레저나 ㈜동양의 기업어음(CP)을 불완전 판매할 수 있었고, 동양파이낸셜대부가 계열사인 동양인터내셔널과 동양레저에 거액을 부당하게 대출해줄 수 있었던 것도 궁극적으로 '계열사 간 칸막이가 쳐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인식과 맞닿아 있다.
동양그룹 최고경영진이나 오너들의 파렴치함을 비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오너 일가의 전횡을 변호할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동양사태를 계기로 금산분리를 강화하는 게 과연 실리와 명분이 있는지는 좀 따져봐야 한다. CP 불완전판매의 해결책을 금산분리 규제 강화에서 찾는 것은 너무 단선적이란 얘기다.
금산분리 규제의 진화 과정을 보면 더욱 그렇다. 지난 7월 국회는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보유 한도를 9%에서 4%로 낮추는 내용의 금융지주회사법과 은행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2009년 이명박 정부 시절 당시에 통과시켰던 금산분리 완화방안을 4년 만에 다시 원상복귀 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규제를 강화한 것인데, 흥미로운 것은 지난 4년간 산업자본 가운데 은행지분 보유 한도 4%를 초과해 늘린 곳은 한 곳도 없었다는 점이다. 현재의 금산분리 규제가 현실과 상당히 괴리돼 있음을 방증한다.
소 잡는 칼 따로 있고, 닭 잡는 칼 따로 있는 법이다. 닭 잡는 칼로 소를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도 자칫 요리를 망칠 수 있다.
동양그룹 오너 일가의 부도덕성은 그것대로 단죄하되, 이를 빌미로 섣부른 규제를 도입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경제의 활력을 죽이는 규제는 금융당국의 부실한 감독만큼이나 위험하다. 건전성에 대한 감독이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이를 핑계삼아 과도한 규제의 틀을 쳐선 곤란하다.
이의철 금융부장 charli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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