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에서 이층집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동네 앞으로 가서 동네를 지나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저수지를 빙 둘러 둑길로 가는 길이었다. 낮이라면 모를까, 캄캄한 밤에 둑길로 가는 길이 왠지 내키지 않았지만 앞서 가던 남경희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저수지를 돌아가는 길을 잡아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더구나 아침에 그런 사단이 있었으니 둘이서 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싫었을 것이었다.
캄캄한 둑길에 바람조차 불고 있어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여자를 앞에 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림은 할 수 없이 걸음을 빨리 해 자기가 앞장을 섰다. 어둠 속에서 저수지의 표면이 검은 유리창처럼 나타났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흩어놓고 잠바 안으로 파고들어 풍선처럼 부풀어 올렸다. 아직 채 물이 오르지 않은 마른가지와 풀들이 회초리를 휘두르듯이 윙윙 소리를 내어 불었다. 어두운 둑길 위로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하림은 에밀리 부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황량한 들판이 떠올랐다. 어딘선가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 하고 부르는 캐서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하림은 문득 지금 자기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남경희가 아니라 혜경일지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녀와 같이라면 이런 밤을 걸어가도 조금도 무섭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둠 속을 걸어가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딱 두 종류의 사람 밖에는 없다. 한 사람은 혁명가이고, 또 한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다.
혜경을 생각하니 갑자기 잊고 있었던 그리움 같은 게 느껴졌다.
“혜경아....”
하림은 속으로 자그맣게 불러보았다. 그러나 곧 혜경의 얼굴 위에 또 다른 얼굴 하나가 겹쳤다. 하소연이였다. 그녀 역시 조금씩 그리움으로 변해가려고 했다. 가까이 있어도 그리운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결코 나뉘어질 수 없는 것이다. <폭풍의 언덕>은 바로 그 나뉘어질 수 없는 지독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폭풍의 언덕 보셨나요?”
하림이 그녀가 따라오는 걸 확인이라도 하는 양 고개를 젖히고 물었다.
“오래 전에 영화는 봤는데.... 소설은 못 봤어요.”
그녀가 크게 말했다. 바람이 그녀의 말끝을 잘라먹었다.
“바람이 부니까, 그 소설이 떠오르네요. 지금 저수지 둑길의 풍경이 마치 그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아서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하림이 다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어둠을 향해 말했다.
“지독한 사랑. 그게 무서운 복수를 낳죠. 소설 속엔 이런 말이 나오죠. 우리 둘 다 죽는 날까지 널 붙잡아 두고 싶어! 네가 괴롭든 말든 난 상관없어. 네가 괴로운 건 상관 안 해. 왜 너는 괴로우면 안 되나? 나는 괴로운데.... 너는 날 잊을거니? 내가 땅에 묻혔는데, 너는 행복할거니? 남자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에게 하는 말이죠. 정말 지독하죠?”
하림은 그녀가 듣건 말건 앞을 보고 말했다. 어차피 반은 바람소리가 짤라먹을 것이었다.
“너무 이기적이네요. 난 그런 사랑,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사랑이란 것도 일종의 병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죄악의 근원이기도 하구요.”
그녀가 등 뒤에서 마치 신앙 고백이라도 하듯 말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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