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시원한 푸른색 바다가 그려진 냉장고에는 물고기들이 줄지어 헤엄치는 모습의 일러스트가 귀엽게 장식돼 있다. 또 다른 냉장고는 오래된 쿠바 자동차로 변형됐다. 쿠바인들이 즐겨 마신다는 맥주 '크리스탈(Cristal)'로 깜짝 변신한 냉장고도 있다. 뜨거운 사랑을 상징하는 듯 하트무늬로 가득 찬 냉장고는 새빨갛다. 한켠에는 마치 인공위성에서 찍은 듯한 도시의 입체적 모습이 조각으로 부착된 냉장고가 회색을 뒤집어 쓴 채 삭막한 느낌으로 서 있다.
냉장고를 제재로 한 쿠바 현대작가들의 작품들이다. 폐기된 냉장고에 일상생활과 관련된 주제를 담아 미술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들이 '냉장고'를 소재로 작업을 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이는 쿠바의 '냉장고 역사'를 들여다보면 답이 나온다.
일단 쿠바인에게 '냉장고'는 특별하다. 연중 덥고 습한 쿠바에서 냉장고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 힘들다. 쿠바인들은 냉장고를 음식을 차게 보관하는 용도로만 쓰는 게 아니라 외출 전에 옷을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 그 안에 넣어 놓기도 한다. 쿠바 일반 가정에 미국산 냉장고들이 보급되기 시작한 때는 1950년대다. 쿠바 혁명 후에도 미국인이 남긴 미제 냉장고는 너무 튼튼해서 쿠바 가정에서 대대로 물려주며 살림살이의 대명사가 됐다. 냉장고는 그렇게 한 가족과 40~50년을 함께했다.
한데 21세기 들어서면서 피델 카스트로는 전기 소모량이 많은 이 오래된 냉장고들을 저렴한 중국산 냉장고로 교체하게 했다. 이때 다량의 냉장고들이 폐기처분됐는데 쿠바 사람들은 버려지는 냉장고와 쉽게 '이별'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냉장고는 쿠바인들과 몇 세대를 함께하며 가족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 같은 쿠바의 '냉장고에 대한 정서'를 살려 그 당시 '냉장고 미술작품'을 탄생시킨 인물로는 작가이자 큐레이터 마리오 미구엘 곤잘레스와 작가 로베르또 화벨로가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해 총 55인의 작가가 50점의 작품을 만들었다. 이 중 10점이 현재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 중이다. 올해 첫번째 기획전시로 전시회의 제목은 '빙고!'다. 빙고(氷庫)는 바로 '냉장고'를 뜻한다.
이번 전시는 이들 냉장고 작품과 함께 '정열, 혁명, 사랑, 바다, 여유, 태양, 열대림' 같은 쿠바 사회의 이미지를 연상시켜 만든 국내 작가들의 미술작품들도 살펴볼 수 있다. 또 강제욱 작가는 '체의 마지막 혁명-볼리비아 산타크루스 순례기'라는 제목으로 사진들을 선보인다.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마을, 체가 볼리비아 군인들에게 붙잡힌 장소, 마지막 식사를 하고 처형당한 곳, 비밀리에 매장된 체의 시신이 발견된 바예그란데 지역 공항 활주로 등 작가는 체 게바라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그곳의 현재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해 뒀다. 전시장 내부에는 이러한 사진작품들과 함께 체 게바라가 애용했다는 마테차를 마실 때 썼던 파이프, 시가(cigar) 등이 비치돼 있다. 전시장 정면에는 'VIVA CUBA LIVRE'라는 커다란 글씨가 쓰여 있는데 바로 '자유 쿠바 만세'라는 뜻이다. 또 이곳에서는 쿠바의 대표 술인 럼주와 미국의 대표 음료 코카콜라를 섞은 쿠바 칵테일 '쿠바 리브레'가 소개된다.
전시를 담당한 기획자 중 한 명인 김노암 전시감독은 "쿠바 정부의 냉장고 폐기 정책 시행과 함께 많은 예술가들이 냉장고를 현대미술의 오브제로 이용한 작품을 제작하게 됐다"며 "쿠바혁명과 미제냉장고는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전시는 9월 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1층 전시관. 문의 02-399-1152.
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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