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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5장 저수지에서 만난 여인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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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5장 저수지에서 만난 여인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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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하림이 처음 이곳으로 올 때만 해도 그저 모든 걸 강 건너 불 보듯, 일체 어떤 일에도 상관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던 터였다. 똥철이 즐겨하던 말처럼, ‘남 똥 누는 데 용 쓰지 않기’ 였다. 그런데 그런 결심과는 달리 차츰 어떤 힘에 의해 끌려가듯 금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오불관언(吾不關焉)의 결심보다 더 강한 무엇이 호기심이었다. 호기심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하는 무엇보다 강한 유혹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아마도 아까 산책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여자로부터 시작되었을 거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이층집’ 이라는 말이나, ‘개의 죽음’ 따위는 그저 추상적인 말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를 만나고부터, 물론 단 한 마디의 이야기도 나눈 것이 없었지만, 왠지 구체적인 무엇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윤여사 고모할머니로부터, 고년, 어쩌구저쩌구 하는 말을 들으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마당을 맴돌던 하림은 걸음을 멈추고 화실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화실은 윤여사, 윤재영이란 여자의 화실이었다. 생각하면 우스웠다. 그날 동묘에서 동철이 소개로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이곳에 올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그러자 다시 생각은 윤여사를 너머 혜경이에게로 향했다. 혜경이를 생각하자 콧등이 찡해져 오며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아득하였다. 마지막으로 미장원에서 같이 자면서 했던 혜경의 말이 떠올랐다.

“....가난하고 고생하며 사는 건 두렵지 않아. 그냥 이렇게 내 생이 고정되어 버리는 것이 더 두려워. 아침에 눈을 뜨면 만나는 똑같은 사람, 똑 같은 일, 똑 같은 뉴스....”
그리고 그녀는 또 말했었다.
“내 것이 아닌 세상의 물결에 휩쓸린 채 모래시계처럼 빠져나가는 나의 생이 두려워. 세상은 나를 이미 자기에 맞게 튜닝을 했고, 난 그 속에서 꼭두각시가 되어 살고 있는 느낌이야.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이라면, 이렇게 늙어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그 말이 하림의 가슴을 송곳처럼 아프게 찔렀었다. 자기라고 그 물음에 대해 이렇다하고 답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생각하면 자기의 삶 역시 방향없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또 말했었다.
“넌 결혼 안 해 봐서 몰라. 폭풍 같은 한 순간이 지나고나면 일상적인 삶이란 놈이 기다리고 있지. 그게 재미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아니야. 한번 해봤으니까. 그리고 은하 하나 키우기도 내겐 벅차. 친구들 이야기로는 딸은 자신의 운명과 같아서 평생 따라다니는 거래. 너랑 결혼하면 또 아이를 낳아야 할 텐데, 난 그럴 자신이 없어. 이렇게 나의 생이 끝날 것 같은 두려움도 들고....”
그렇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하림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게 끝이 난다면 너무나 슬프고, 슬프고, 또 슬픈 일일 것이었다. 그리고 억울했다. 자신의 청춘과 추억이, 아니, 이 지상에서의 삶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듯한 절망감이 들었다.


‘혜경아....’
하림은 속으로 자그맣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이름이 어떤 출렁거림을 가지고 다가와 하림의 가슴 깊숙한 곳을 적셨다. 자기를 바라보던 혜경의 그윽한 눈빛이 떠올랐다. 멀리 바람결에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연인을 찾아 지옥에 간 올페처럼 자기에게도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사랑하는 이름을 대라면 하림은 기꺼이 혜경이, 그 이름을 부를 것 같았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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