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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바퀴벌레가 인간을 위해 음복(飮福)함

시계아이콘읽는 시간54초

#1. 나는 바퀴벌레다. 사는 곳은 술집이다. 정확하게는 호프집의 냉장고 뒤다. 호프집은 바퀴벌레가 살기엔 최적의 장소다. 먹잇감이 널려 있다. 행여 오해는 마시라. 손님 안주에 손, 아니 발을 대지는 않는다. 그간 터득한 생활의 지혜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손님 테이블에 올라갈 이유가 없다. 그걸 탐하다가 명을 재촉한 동료들이 많다. '욕심이 지나치면 뒤끝이 안 좋다'는 게 우리 종족의 속설이다. 여기에 술꾼들이 토해내는 그 끈적끈적한 호흡과 침침한 불빛까지. 호프집은 정말 최고의 안식처다.(관련칼럼 본지 4월18일자 초동여담 '바퀴벌레를 위해 음복함' 참조)


#2. 나는 날개가 있지만 날지는 못한다. 원래부터 날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한때 '전설의 비행'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련함으로만 남아 있지만, 등 뒤에 돋아 있는 갈색의 엷은 날개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준다. 요즘은 나이를 먹어서인지 뛰는 것도 예전만 못하다. 한창 때는 정말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파리채가 날아와도 피할 정도였으니까. 14명이 지키는 포위망을 뚫고 냉장고 뒤로 숨은 적도 있다. 일명 '14대 1'의 전설이다.

#3. 며칠 전의 일이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먹이를 찾으러 냉장고 뒤에서 나왔다. 냉장고의 모서리를 막 타고 내려오는 순간,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자그마한 체구에 눈이 맑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가까이서 사람과 눈이 마주친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발을 헛디뎠다. 발이 꼬이면서 넘어졌는데 재수가 없으려니 몸이 뒤집혔다. 예전엔 몇 번 발을 허공에 구르면 금세 정상 체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살도 찌고, 몸도 느려져선지 한번 뒤집히면 도무지 돌이킬 수가 없다. 발을 아무리 굴려도 허공에 헛발질만 할 뿐이다. 힘이 서서히 빠진다.


#4. 최악이다.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나를 꾸우우우욱 밟았다. 이런 제길. 불행 중 다행은 구두 사이의 틈새로 밟히면서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앞에서 6번째 왼쪽 발을 움직여보았다. 아 움직여진다. 오른쪽 발도 휘저어보았다. 약간 뻐근하지만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다시 몸만 뒤집으면 된다. 누군가 내 몸을 구두코로 차주기만 해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먹여 살릴 가족이 몇 마린데…. 여기서 끝날 순 없다. 아, 근데. 나와 아까 눈 마주친 사람은 뭐하는 거야?

<여하(如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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