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지키는 사람들 <1>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아시아경제 이명재 기자]책의 위기는 정신의 위기이며, 책의 죽음은 한 사회의 사멸의 전조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정신적 소멸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공룡과도 같다. 그러나 또한 그 죽음을 막아서는 사람들, 우리 사회 정신의 키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책의 위기, 정신의 위기에 책을 지키는 사람들의 분투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혹독한 한파가 실내에까지 밀고 들어온 듯 싸늘한 방 안에서 그는 물끄러미 앞을 응시하고 있다. 어지러이 쌓여 있는 낡은 책 더미에서 풍기는 서향(書香)이 방 안을 휘감고 있다. 단아한 체구지만 형형한 눈빛이, 세속의 허명을 등진 이에게서 보이는 청정한 눈빛이 얼음장 같은 한기를 압도하면서 그의 몸의 일부와도 같은 책들을 향하고 있다.
그의 서재이자 작업실이며 또한 도량(道場)인 이곳에서 그는 스스로 몸과 마음을 씻어내며 여전히 책을 만들고 있다. 늘 공부하며 수신하는 그의 지성과 치성은 장인(匠人)을 낳았고, 장인의 혼신이 다시 지성을 닦았으며 엄숙한 제의로서의 출판이 있게 했다. 그리고 그 지성과 장인과 엄정함은 우리 사회 출판과 지식의 안목과 지평을 깊게 했으며 넓게 했다.
69년 설립 이후 책을 만들어 온 지 40여 년, 이제 70대를 훌쩍 넘겼지만 어느 청년보다 더욱 푸르른 '청년'인 김경희는 꺾이지 않는 열정과 혼으로 여전히 책을 만들고 있다.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경복궁 뒤편의 이 작은 건물을 지식의 전당으로, 그를 하나의 세계의 군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지식산업사와 김경희의 지난 43년은 출판을 향한 혼신과 분투의 기록이었다. 한 출판인의 고난에 찬 역정이었으며 한 지식인의 고투였고, 한국 출판의 성취와 영광, 시련의 기록이었다.
지난 시기, 그리고 지금 여전히 그가 출판의 현장에 남아 있다는 것은 한국 출판의 복이며, 한국 문화의 복이며, 많은 인문학도와 지식인들, 문사철(文史哲) 저자들의 복이었다. 몇 년 전에 그가 수상한 '간행물윤리대상'조차 김경희의 복이 아니라 차라리 그 상의 복이었을 것이다.
인문학 가운데서도 한국학과 한국 주변학을 중심으로 어린이 책에서 전문 학술연구서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뤄온 지식산업사는 결코 책을 많이 내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많은 책보다는 한권 한권의 책에 한땀 한땀 바늘을 놓듯이 정성을 다하는 데서 자신의 묵묵한 소명을 찾고자 했다.
시류를 따르지 않는, 아니 시류를 거스르는 책들을 세상의 독자들에게 내왔지만, 그러나 결국 그것은 역설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선취하는 예지적인 선구가 되었다. '좁은 문'을 애써 찾아 들어간 그 걸음은, 아니 애초에 없던 문을 새로 내느라 힘겨웠던 그 행보는 결국엔 그 문 뒤에 기다리고 있던 미지의 광활한 신천지를 활짝 열어젖힘으로써 애초에 확신하지는 않았던 보상과 영광을 가져다주곤 했다.
가령 1971년 <이조 회화>로써 한국에서 미술 출판을 가장 먼저 시작했던 것은 "한국에는 미술이 없다"고 생각하던 우리 문화예술에 대한 '엽전의식'적인 자기비하를 일축하고 한국 미술의 드넓은 고토(故土)를 발견하게 했다. 지식산업사의 수많은 책들이 책으로서의 선구일 뿐만 아니라 그 분야에서의 개척자이며 정초(定礎)였다.
지식산업사를 대표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조동일 교수의 역작인 <한국문학통사>는 한국문학의 전통의 주체 선언문을 넘어서 '한국문학사'라는 학문적 계보의 확고한 시조로 등극했다. 민두기 교수 등과의 중국사 작업, <박경리 전집>의 발간, 신용하, 김용섭 교수 등의 저작들은 한국의 문사철의 장엄한 파노라마였다.
당대의 지식인들과의 학문과 출판의 협업은 한국에 보기 드문 풍요로운 지식의 향연을 펼쳐 보였다. 플라톤이 꿈꿨던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심포지엄'을 연출했다. 그 장엄하면서도 흥겨운 향연에 동석한 필자들은 알코올 없이 취해 왔으며, 공자가 말했던바 발분(發憤)과 망식(忘食)의 일체감을 느꼈다. 그러므로 저자이면서 지식산업사의 정신적 주인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필자들 40여명이 83년 지식산업사 후원회를 결성한 것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벗이자 도반으로서 보낸 지극히 필연적인 우정과 연대였다.
김 대표가 출판을 대하는 자세의 엄정함은 '님'을 대하는 것으로서의 그것이다. '님만 님이 아니다.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라고 할 때의 그 님과 같은 그리움과 절절함이다. 그리고 한용운이 '님의 침묵'을 통해 독립의 염원을 얘기했듯, 그에게는 책을 낸다는 것은 사실 독립운동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 말이 전혀 허언이 아닌 것은 그에게는 책을 내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지적 독립이며 진정한 건국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말한 대로 교육과 언론, 그리고 출판으로 이뤄지는 '문화의 정삼각형'이야말로 독립과 건국을 위한 근육이며 심장이기 때문이다.
"이 문화 정삼각형은 현대문화의 핵심인 학문과 예술 그리고 과학 기술의 보호막이다. 이 보호막의 크기가 선진과 후진, 강대국과 약소국을 규정한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출판이 난장이가 되면, 교육과 언론도 난장이가 되며, 그 둘레에 있는 정치와 경제 사회도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에겐 책과 출판은 새롭게 진흥해야 할 것이라기보다는 원래 있던 것을 찾는 것이며, 부흥해야 할 것이며, 복원해야 할 것이다. "우리 겨레가 갖고 있던 고대 중세 이래의 찬란한 문화, 그 전통을 다시 발견하고 살려놓아야 한다는 심정이었다."
이 훌륭한 전통문화를 '날줄'로 삼고, 우리가 미처 갖지 못한 문화 곧, 세계 각국이 만들어 놓은 외래문화를 과감히 받아들여 '씨줄'로 삼아, 오색찬란한 '새로운 세계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형 세계문화'가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 동안에 우리 겨레가 세계의 '한 중심' 으로 우뚝 서서 창조해야 할 몫이다. 지식산업사는 이 길을, 겨레의 뜻 있는 많은 이들과 함께 꾸준히, 끈덕지게, 전진할 것이다"
그러나 출판과 사회의 장래를 염려하는 그의 눈에는 지금 근심이 가득 차 있다. "지금 우리 문화 풍토, 출판의 현실은 인문학자, 곧 문학, 역사, 철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연구 업적이 그때그때 제대로 출간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한국의 대학의 위기로 되고, 마침내 교육 전반의 한계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생각건대 그의 지나온 삶, 뛰어난 문학평론가였으며 지식산업사의 설립자였던 형의 죽음이라는 가족사의 비극과 재난이 마치 제물처럼 출판에 바쳐졌던 그의 고난의 삶이 그를 더욱 강철같이 단련시켰듯이, 책과 출판의 위기는 지금의 시련 속에서 그 전진의 동력과 지혜를 얻어내야 할 것이다. 정밀(靜謐)하면서 치열하고, 부드럽되 단단한 그의 풍모처럼, 지식산업사가 뚜벅뚜벅 걸어온 길, 그 여정에 과거로부터 현재의 성취는 물론 미래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는 지금 기다린다. 그처럼 맑으면서 수심으로 가득 찬 그의 눈을 가진 후학들, 젊은이들을 그는 간절히 기다린다. 할머님의 백일기도 치성으로 태어난 그의 생일이 부처가 입적한 음력 2월 보름이었음에서 형의 죽음이 그의 출판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의 탄생으로 이어진 인연을 가져왔듯이 책의 영생(永生)을 이어줄 또 다른 숙명적 인연들, 후학들을 기다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람들은 은둔을 위해 깊은 산중이나 시골을 꿈꾸지만 철학자에게 그건 부질없는 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면 언제라도 자신 속에 들어가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 속보다 고요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은 없다" 그의 영혼 속의 쉼터인 경복궁 뒤편의 출판사 서재에서 그는 경복궁보다 큰 정신의 궁전을 지을 젊은 지성들을 기다린다. 책들이 뿜어내는 훈향(薰香)을 함께 나눌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명재 기자 pr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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