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재범 기자]문어체식 제목 작명의 속뜻을 보자. 영화 자체의 과도한 자신감이다. 그 만큼 주제 자체를 전면에 배치해 관객들에게 직격탄으로 날리겠단 의지다. 그 자신감이 사실일 경우 ‘탄’을 맞은 관객들의 통증은 꽤 쎄다. 반면 단순한 시선몰이를 위한 일종의 트릭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다음 달 8일 개봉하는 ‘내가 살인밤이다’를 보면 이런 두 가지 관점이 혼합돼 있다.
영화를 본 소감은 전자의 의미가 강했다. 자신감이 넘친다. ‘화성연쇄 살인사건의 진범이 세상이 제 발로 나온다면?’이란 일종의 과잉상상에서 출발한다. 포스터 자체의 도발성은 자신감을 넘어 자만감으로 느껴질 정도다. 쫓는 자가 있다면 쫓기는 자는 스토리의 핵심 소스다. 그 소스를 어떻게 요리하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그 소스는 숨겨야 한다. 그런데 ‘내가 살인범이다’는 이소스를 처음부터 까발린다. ‘쉐프의 눈에 싱싱한 재료가 보이고 그 재료가 도마 위에 버젓이 있다. 이제 당신들은 어떤 요리가 나올지 보면 된다.’ 이런 정도로 설명 가능하다.
독특함에서 따지면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던 설정이다. 연쇄살인범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돼 팬덤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잡아야 할 경찰 최형구(정재영)는 눈앞에 있는 먹이를 보고도 쉽게 달려들지 못한다. 사육사가 던져 준 생닭을 보고도 군침만 흘릴 뿐 빙빙 돌며 의심과 눈치를 보는 사자 꼴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있어야 한다. 바로 공시시효 만료란 덫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강력범죄의 급증과 사형제도의 사실상 폐지를 놓고 사회적 논란이 거세다. ‘내가 살인범이다’는 이런 사회의 거대 담론에서 출발해 보면 섬뜩한 수준의 가상 논리 성립이 성공할 수 있단 시나리오를 공개한 셈이다. 이런 재료로 만들어진 영화적 만듦새는 필연적으로 두뇌 싸움이 동반된 스릴러 구조를 띄어야 한다. 하지만 발칙하게도 ‘내가 살인범이다’는 이 공식을 깬다. 그 첫 번째가 영화의 시작이다.
연출을 맡은 신예 정병길 감독은 액션스쿨 출신의 액션 배우 지망생이었다. 전작인 다큐 ‘우린 액션배우다’를 통해 보여 준 카메라 감각을 첫 장편 상업에서 유감없이 발휘한다. ‘내가 살인범이다’의 초반 액션 시퀀스의 몰아침이 그 증거다. 체감 시간 약 20분 이상의 상당히 긴 시간을 ‘원씬 원컷’(사실은 세 컷 정도로 나뉘어져 있지만) 느낌으로 구성해 관객들의 호흡을 빼앗는다. 화면을 담은 카메라의 미묘한 떨림으로 배우들의 호흡을 느낄 수 있게 관객들을 추격전의 한 가운데로 끌어 들인다. 이 액션 시퀀스를 주인공 형구의 시선으로 처리해 더욱 강력하게 가슴을 쪼인다.
형사물의 익숙함을 깨기 위한 점도 있다. 한국영화 히트목록 순위를 보면 꽤 여러 편의 형사물이 이름을 올려놨다. 하지만 실패작도 꽤 많다. 특히 문어체 제목의 형사물 몇 편이 공개됐지만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내가 살인범이다’는 이런 실패의 공식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모른다 해도 스토리 전개의 방식이 꽤 영리하다. 단순히 결말을 위한 과정 선택이 아닌, 현실과 비현실의 교차를 교묘히 이용한다. 두 공간의 부딪침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잔재미로 이어지며 다소 어두운 느낌의 스릴러 장르 무게를 덜어냈다. 이런 점이다. 복수를 하기 위해 연쇄살인범 이두석(박시후)을 납치한 피해자 가족들과 형구의 카체이싱 장면을 보자. 화면 구성의 조악함이 높아진 국내 관객들의 시선을 만족시키기엔 다소 빗겨 있다. 하지만 ‘말이 돼?’라는 혼잣말을 쏟아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집중하게 만든다. 쫓고 쫓기는 또 빼앗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각각 캐릭터들의 절실함이 가득한 장면이다. 그런데 감독은 오히려 이 장면에서 그런 감정을 뺐다. 영화 초반 캐릭터들의 휘몰아친 감정에 지친 관객들에게 쉴 순간을 제공한 셈이다. ‘영화는 엔터테인먼트’란 사실에 부합되는 시퀀스다.
현실과 비현실의 교차를 표현한 최고 하이라이트는 후반부 방송 출연 장면이다. ‘쫓는 자’ 형사와 ‘쫓기는 자’ 살인범을 한 공간에 집어넣은 뒤 관객들에게 퀴즈를 낸다. ‘자 당신이 생각하는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관객들이 스스로 정답을 내릴 때 쯤 영화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상천외한 반전 카드를 공개하며 “내가 살인범이다”란 제목의 이유를 밝힌다.
전체 구조로 보자면 진짜로 시작해 영화로 풀어가며 충분히 있을 법한 가능성의 제시로 끝을 맺는다. 일부 관객들은 영화 곳곳에 배치된 익숙함을 기존 영화의 그것에서 찾으며 ‘모방’으로 지적할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근래 보기 드문 독특한 설정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스토리 동력의 힘, 그리고 데뷔 첫 형사 캐릭터로 열연한 정재영과 새로운 살인마의 전형을 그려낸 박시후의 연기력은 튼실한 수조안에서 생기 넘치는 활어처럼 돌아다닌다. 더욱이 각각의 캐릭터들이 내뱉는 대사에 집중하다 보면 퍼즐처럼 짜여 있는 영화의 구성에 빠져들 수도 있다.
이밖에 첫 상업영화 데뷔작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의 연출력을 보여 준 정병길 감독의 감각은 새로운 액션키드의 탄생이란 수식어를 주기에 충분하다.
마지막 감상 포인트 하나. 비정상적인 팬덤 현상, 저질 언론의 노골적인 비꼼, 방송의 무분별한 선정성을 담은 B급 정서의 에피소드들은 ‘내가 살인범이다’의 보너스다. 개봉은 오는 8일.
김재범 기자 cine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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