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K리그 감독 사이에선 슬로건 열풍이 불었다. 지난해 전북 '닥공(닥치고 공격)'과 울산 '철퇴 축구'의 성공에 따른 자극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무공해 축구', '방울뱀 축구', '용광로 축구' 등 저마다 특색들을 내걸었다.
이에 발맞춰 상주 상무도 멋들어진 네 글자를 내놓았다. 죽을 수는 있어도 패할 수는 없다는 '수사불패(雖死不牌)'다. 다른 K리그 팀처럼 올해 뚝딱 만든 슬로건은 아니었다. 이미 오랜 기간 상무 정신의 상징과 같았다.
상주 상무는 현재 경기에 나서지 않고 있다. 내년 시즌 2부리그 강제 강등에 항의, 잔여 경기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미 후반기 두 경기가 0-2 기권패 처리됐다. 내년도 2부리그 참가에 사실상 합의하고도 보이콧은 철회되지 않고 있다.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남은 12경기에 대한 결과도 같을 것이다.
'수사불패'와 '기권', 공존할 수 없는 두 단어다. 이에 상무 선수단을 관리하는 국군체육부대는 25일 "최근 상무 축구단의 프로축구 후반기 잔여 경기 불참과 관련하여 일부 언론에서 '기권승(패)'이라고 보도하고 있는바, 이 표현 사용 자제를 요청 드림"이라고 밝혔다.
'기권'이란 표현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명분과 명예다. 이들은 "'기권승(패)'라는 표현 자체는 잘못됐다고 할 수 없지만 이번 사안은 프로연맹의 부적절한 조치에 대한 국방부의 정책적 판단에 따라 결정된 사항으로 명예와 사기를 중요시하는 군의 입장에선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 판단된다"라고 설명했다.
연맹 측은 난감한 입장이다. 한 관계자는 "군의 특수성과 입장은 이해하지만, 팀이 경기에 나서지 않는 건 맞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더불어 "그동안 이런 경우는 기권승(패)란 용어를 사용해왔다"라며 "기권은 기권일 뿐"이라고 말했다.
상주 구단도 국군체육부대의 완고한 태도에 벙어리 냉가슴만 앓는다. 구단 관계자는 "상무와 별개로 상주는 경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털어놨다. 그는 "상주가 왜 상무와 함께 창단됐겠는가"라며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상주 시민 구단 창단이다. 아직 기반이 열악한 상황에서 상무를 교두보삼아 시민 구단 창단의 초석을 다지기 위함이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솔직히 구단 내에선 스플릿 후반기 전패도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라고 말했다. 무리가 아닌 지적이다. 최근 16명의 선수가 한꺼번에 전역했다. 최효진, 김치우, 김치곤, 권순태 등 주력 선수가 대부분이다. 전력이 반 토막 이상이 난 셈이다.
이 관계자는 "그럼에도 기권패보다는 경기에 뛰는 게 낫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당장 경기가 없으니 시민들의 관심에도 문제가 생기고, 선수들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친다"라고 귀띔했다. 당장 내년 2부리그 참가시 경기력 문제는 물론, 시민 구단 창단을 위한 축구붐 조성에도 어려움이 생긴다는 지적이다. 국군체육부대는 동기 부족에 따른 승부조작 우려를 내놓지만, 그는 "오히려 더 그렇기에 선수들이 더 열심히 뛸 수 밖에 없지 않겠나"라고 말한다.
'눈 가리고 아웅'인 점도 있다. 국군체육부대는 "한국프로축구연맹 K리그 경기·심판 규정 제33조에 의거, 대회 중 잔여 경기를 포기하는 경우에는 포기한 팀이 0-2로 패한 것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어 0-2라는 표현은 문제가 없다"라고 덧붙였다. 포기와 기권은 다른 말로 쓰이지 않는다. 포기한 팀이기에 0-2란 표현을 쓰는 걸 받아들이면서, 기권이란 말은 쓰지 말아달란 표현은 억지에 가깝다.
연맹의 영문 공식 기록에 남는 상무 상주의 패배 이유 역시 withdraw. '물러나다' 혹은 '철수하다'란 뜻이다. 국군체육부대가 그토록 강조하던 수사불패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전성호 기자 spr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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