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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리더學]사대부와 맞짱 뜬 조선판 鐵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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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비-③권력투쟁 한복판 속 냉철한 전략가, 문정왕후 윤씨


[포커스리더學]사대부와 맞짱 뜬 조선판 鐵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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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신하들에 의해 한 나라의 왕이 바뀌었다. 왕의 조강지처마저 쫓겨났다. 피바람 부는 권력투쟁 속에서 조선시대 여인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더 강해지고 더 독해지는 것이다.

중종의 세번째 부인인 문정왕후 윤씨는 왕비자리에 오른 후 차례차례 정적을 제거해나가며 친아들 명종을 왕위에 앉혔다. 그는 이후 20년 간 국왕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장악했다. 권력투쟁 속에서도 과감하게 자신의 길을 찾은 전략가, 냉철한 피의 여인으로 평가된다.


역사책 즐겨보며 처세술 익혀…차례로 정적 제거
지나친 집권욕에 정치혼란 장본인…호불정책 기여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철두철미함=문정왕후 윤씨가 왕비로 간택돼 들어온 궁궐 안은 훈척신 세력들과 사림들 간의 세력다툼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왕비로 간택된 지 2년 만에 조광조가 훈척신 세력의 모함으로 제거되자 사림세력들도 연루돼 제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문정왕후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처세의 길을 도모한다. 중종이 아무리 후궁의 처소에 드나들어도 질투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문정왕후는 부녀자의 덕목을 강조하는 서적보다는 역사책을 더 즐겨 읽었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정사를 펼치는 이야기들을 더 재미있어 했다. 이 같은 독서 경향은 그에게 왕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처세의 길을 가르쳐줬다.


[포커스리더學]사대부와 맞짱 뜬 조선판 鐵의 여인

또 왕비가 된 그에게는 중종의 두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 호(인종)를 양육하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이는 그녀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4명의 딸을 낳고 이어 아들 환(명종)을 낳은 그는 세자 호에게 적개감을 품게 된다.


◆과감한 결단력과 행동력으로 상대를 제압=조선시대 여성들은 직접 공적인 영역에 진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남편, 아들 등에 의해 운명이 결정됐다. 문정왕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아들인 환이 왕위에 올라야 자신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아들을 위협할만한 세력은 모두 제거 대상이었다. 문정왕후는 인종이 세자였을 때부터 그를 죽이려 했으나 항상 실패했다. 1527년(중종 24) 2월 세자 생일에는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가르고 입, 귀, 눈을 불러 지져 동궁의 북정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문정왕후는 중종 사후 인종의 죽음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소윤(윤원형파)의 힘은 약해지고 인종의 외숙인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세력이 조정을 장악했다. 초조해진 문정왕후는 인종을 불러놓고 신세한탄을 늘어 놨다. "나야 말로 이제는 외로운 자녀 하나마저 보전치 못하겠구나. 대윤의 득세가 눈 앞에 있으니 앞길이 캄캄하구나. 나는 절에 들어가 선왕의 명복이나 빌어야겠다." 문정왕후는 효심이 깊은 인종이 계모인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고의적으로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 것이냐'며 이런 행동을 일삼았다. 이에 인종은 그의 예상대로 강한 햇빛이 쏟아지는 5월 대비전 앞에서 석고대죄를 했다. 인종의 석고대죄에도 윤씨는 조금도 끄떡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인종은 쓰러져 몸져눕고 말았다. 인종은 이질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인종은 재위 1년도 못 채우고 생을 마감했다.


문정왕후는 권력을 얻기 위해 이외에도 많은 정적들을 일소했다. 만일 그가 다른 정적보다 처세에 능숙하지 않았다면 권력을 잡지 못했을 것으로 평가된다. 폐비가 됐을지 모른다. 여성에게 많은 제약이 있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권력기반을 다진 문정왕후는 이러한 면에서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된다.


◆사대부와 맞서 호불정책 강행=문정왕후는 사대부들의 제거 1순위 대상이었다. 유교국가에서 여성으로서 정숙하지 못하고 모든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했다는 이유였다. 사대부들은 문정왕후도 조선의 다른 여성들과 같은 존재, 즉 삼종지도에 따라야 하는 아녀자로서 임금을 따라야 하는 신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마치고 명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도 윤원형을 통해 조정을 움직였고 환관과 궁녀를 시켜 명종을 감시했다. 직접 명종과 담판을 벌린 일도 부지기수였다. 사대부들은 문정왕후가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문정왕후는 사대부들을 제압하기 위해 호불정책을 폈다.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입원이 필요했다. 왕실 재정은 각종 진상과 소유 토지에서 거둬들이는 조세 수입이 대부분이었다. 이외에 왕실과 관련된 사원의 토지에서도 그 일부를 충당했다. 사원들은 왕실로부터 사회적 존립을 보장받으면서 왕실 불사를 담당하는 한편 왕실의 사재정 일부를 충당하는 공생관계를 갖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사대부들을 견제하는 한편 사적인 수입을 위해 불교계를 중흥하려 했다. 그러나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에서 문정왕후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불교계를 관리할 새로운 인물 보우를 등용했다.


◆여군주로 삶을 살다간 여성=홀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문정왕후 윤씨는 우연히 궁궐로 들어와 자신의 의지대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었다. 능수능란한 처세의 기술과 적에 맞서는 강경한 대응은 그가 조정 내 권력투쟁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국왕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던 문정왕후의 삶은 죽는 그 순간부터 부정됐다. 문정왕후는 자신을 위협할만한 모든 세력들을 적으로 몰아 제거했고 이 때문에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조선 사대부들의 저주 대상이 됐다. 명종실록에서는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문정왕후는 사직의 죄인"이라는 글이 전해진다. 문정왕후의 지나친 집권욕은 명종대의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법 질서를 크게 해치는 주 원인이 되기도 했다. 카리스마적 리드십도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의 호불정책은 나름대로 역사에 기인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숭불정책의 결과로 증가한 승려들이 의병을 일으켜 구국활동에 나선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 공동기획
 도움말: 역사학자 윤정란




조슬기나 기자 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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