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영화 'REC 알이씨'(제작 핑크로봇)의 시작은 누구나 인터넷 공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야동' 셀프 카메라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화장실에서 카메라 렌즈에 얼굴을 들이미는 남자 영준(송삼동 분). 녹화가 되는 것을 확인한 그는 또 다른 벌거벗은 남자 준석(조혜훈 분)을 앵글 안으로 끌어들인다. 둘은 오늘로 만난 지 딱 5년에 접어드는 동성 커플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둘만의 추억을 비디오에 담기로 한 것이다. 영준과 준석은 지나온 시간들을 회상하며 변치 않는 사랑을 확인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왠지 오늘이 그들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단편 '올드랭 사인'(2007)으로 국내ㆍ외에서 주목 받은 소준문 감독의 장편 데뷔작 'REC'는 동성 연인의 이별 과정을 대화와 비디오라는 매체로 이야기한다. 70분 남짓한 러닝타임 동안 'REC'에는 영준과 준석 두 명만 등장하며, 좁은 모텔 방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전혀 진부하거나 지루하거나 단조롭지 않다. 배우들이 직접 찍은 셀프 카메라 영상 그 자체가 영화의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기가 드러나는 전라 노출을 감행한 송삼동, 조혜훈 등 두 '스트레이트' 배우들의 리얼한 '게이' 연기는 극에 묘한 현실감을 더한다. 낯설기 짝없는 얼굴과 이름이지만, 이후 우리가 꼭 주목할 필요가 있는 두 배우 송삼동과 조혜훈을 소개한다.
Who is…송삼동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요 포털 사이트 검색 창에 '송삼동'을 치면 배우 김수현이 가장 위에서 발견됐다. 그가 올 초 방영된 TV 드라마 '드림 하이'에서 '송삼동'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캐릭터로 등장해 큰 인기를 누린 탓이다. 정작 송삼동(32)은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마음의 상처를 제법 입었다. 매일 2000~3000명에 달하는 네티즌들이 그의 홈페이지를 찾아와 도배에 가까운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감히 우리 오빠 이름을 따라 한다"는 터무니없는 욕을 먹기도 했다. 석 삼(三), 동녘 동(東). 어렸을 때는 죽기보다 싫었던 이름이었다. 한 번 들으면 잊고 싶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 삼동, 올해로 연기 경력 7년째인 배우 송삼동은 자신의 이름이 최고라고 여긴다.
송삼동은 로카르노영화제 수상작인 노영석 감독의 '낮술'(2008)을 비롯해 다수의 독립 영화에 모습을 보인 어엿한 주연 배우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도 'REC'에 선뜻 출연 결정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퀴어' 영화는 '해피 투게더'나 '브로크백 마운틴' 정도 봤을 뿐, 그전까지는 전혀 그의 관심사 밖이었다. 이런 그가 남자를 사랑해야 하는 역할로, 게다가 성기 노출 장면이 있는 영화에 자신을 던지는 것은 어려웠다. 송삼동은 마음을 다잡았다. 순간 출연 여부를 고민하는 자체가 '겉멋'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영준을 위해 자기 자신을 놓았다.
'REC' 이후 송삼동은 배우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전까지는 전혀 관심 밖이었던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부정보다는 긍정의 마음이 생겼다. 배우로서도 이젠 할 수 없는 역할이 없을 것 같은 뿌듯함이 든다. 너무 쉽게 벼락 스타가 되는 어린 배우들을 보면 솔직히 부러운 마음도 들지만, 송삼동은 절대 조급해 하지 않는다. 그를 믿어주고 인정해주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송삼동은 언제나 그의 연기 인생을 건다.
Who is 조혜훈...
충무로 영화계에 불문율이 하나 있다. 동성애자 감독이 연출한 독립 영화에 동성애자로 출연한 스트레이트 배우들이 가파른 스타덤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물론 영화의 질이 선행되어야 하는 규칙이지만,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에 출연했던 김남길과 '조선명탐정'의 제작자로도 유명한 김조광수 감독이 연출한 '친구사이?!'의 이제훈은 현재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톱 스타다. '초짜' 신인 조혜훈(27)도 'REC'에 출연하면서 살짝 들떴다. '제 2의 김남길, 제 2의 이제훈' 운운하는 옐로우 저널리즘의 '오버'도 한몫했다. 그러나 올 초 전주영화제 기자회견에서의 "뜨기 위해서 동성애 영화 찍은 거냐?"라는 기자의 질문에는 울컥했다. 조혜훈은 그저 배우의 삶을 살고 싶었을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여러 편의 장편 영화에 출연한 송삼동과는 달리 조혜훈은 'REC' 전에는 학교 단편 영화 외엔 장편 경험이 없었다. 조혜훈에게 독립영화 스타 감독 소준문의 신작 출연 제의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지만, 그가 느낀 부담과 걱정은 송삼동보다 덜하지 않았다. 해결책은 무작정 송삼동과 가까워 지는 것이었다.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촬영 중 거짓 감정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조혜훈은 영화 스태프들과 대면하는 첫날, 서먹해 하는 송삼동의 손을 불쑥 잡았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인터넷 보이스 채팅을 통해 그는 송삼동과 2주일 내내 대본 연습에 집중하기도 했다. 노력이 빛을 발했다. 무뚝뚝한 광주 청년 조혜훈은 'REC'에서 귀엽고 사랑스럽고 여성적인 준석을 온 몸으로 체화한다.
조혜훈은 'REC'를 계기로 '영화로 밥 먹고 살아야 하는' 프로 배우의 길에 접어들었다. 추위는 질색인 탓에 '외풍'이 심했던 'REC'의 추운 현장을 떠올리면 아직도 끔찍하다고 웃는 그는 여전히 철없는 20대 청춘의 전형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연기와 동선, 연출이 보여서 미치겠다고 말하는 조혜훈의 눈은 매섭고 노련하다. 'REC'가 그를 이렇게 바꾸어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태상준 기자 birdcage@·사진_이준구(A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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