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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평 초록은행..땀을 예금해놓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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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富者가 된 父子 베어트리파트 설립자 이재연씨, 원장 이선용씨의 이야기

10만평 초록은행..땀을 예금해놓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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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성정은 기자]부자(父子)가 48년을 쏟아 만든 길을 걸었다. 살랑한 가을 바람, 늦가을의 끝자락에 걸친 빨간 단풍.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이 유독 좋은 날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무를 심으며, 꽃을 심으며 다독였을 흙들이 정(情)의 기운을 자아냈다. 이 길에선 부자(富者)의 철학도 묻어났다. 수십 년에 걸친 기업가 인생에서 얻은 철학, '자연에 대한 투자가 제일 수익이 좋다'는 것이 그것이다.


단풍이 마지막으로 그 빛깔을 자랑하던 지난 3일 충남 연기군에 있는 '동물이 있는 수목원', '베어트리파크(원장 이선용)'를 찾았다. 이 수목원의 설립자인 이재연(81)씨의 아들이자 원장인 이선용(51)씨와 나란히 수목원 길을 걸었다.

10만 여평에 이르는 땅을 가득 채운 1000여 종, 40만 여점의 꽃과 나무들, 100여 마리를 훌쩍 넘는 반달곰과 사슴들도 만났다. 나무를 따라, 동물원을 따라 이어지는 길고 긴 길 만큼 오래 묵힌 부자의 얘기들이 계속됐다.


10만평 초록은행..땀을 예금해놓은 사람 베어트리파크 전경.


◆10만 여평 수목원의 시작은 집 앞마당이었다=이선용씨의 아버지인 이재연씨는 경영 논리가 뼛속까지 밴 기업인이다. 대림산업 창업주 이재준 회장의 동생인 아버지 이씨는 1959년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여동생인 구자혜씨와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 본격적인 기업인 인생을 시작했다.


아버지 이씨는 장인이었던 고(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지시로 한국은행을 그만두고 LG그룹에 입사했다. 입사 1년 만에 비서실장에서 상무이사로 승진한 그는 33살에 그룹 최연소 임원이 됐다. 그 뒤 아버지 이씨는 자금난에 허덕이던 무역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등 기업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져갔다.


1976년 LG전선이 대한전선과 공동으로 경영하던 한국광업제련 대표를 맡았을 때 얻은 별명도 있다. 바로 '재계의 해결사'다. 여유자금이 전혀 없던 회사의 매출을 4년 만에 수십 배 이상 늘리는 성과를 낸 아버지 이씨는 해결사라는 이름을 안고 기업인 인생 40년을 살았다.


그런 아버지 이씨가 돈을 재지 않고 즐겼던 게 하나 있었다. 나무를 가꾸는 일이었다. 첫 직장이었던 한국은행에서 외국환 업무를 담당한 덕에 퇴근이 일렀던 아버지 이씨는 집 앞마당에 작은 온실을 짓고 양란을 기르기 시작했다. 베어트리파크의 출발점이었다.


1966년 선대로부터 경기도 의왕시 땅 2만 평을 물려받으면서 집 앞마당 온실은 그 규모를 달리했다.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기 좋아 '송파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의왕시 땅은 수목원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집 앞마당 온실과 송파원은 그렇게 아버지 이씨와 아들 이씨를 이어줬다. 꽃을 심을 때도 함께, 밥을 먹을 때도 부자는 함께였다.


10만평 초록은행..땀을 예금해놓은 사람 단풍이 마지막으로 그 빛깔을 자랑하던 지난 3일 베어트리파크의 모습.


◆수목원에 담긴 '집착'과 '철학'=아버지 이씨는 땅과 자연을 두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은행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들이 은행에 정기적금을 넣듯이, 땅에 씨앗을 뿌리고 물과 거름을 줬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 이씨에게 베어트리파크는 인생의 정원으로 남았다. 지금도 주말이면 이곳에 내려와 별채에 머물며 나무와 꽃 등을 직접 돌본다는 아버지 이씨다.


그런 아버지 이씨에겐 '자연은 배반하지 않는다' '자연은 깃들인 정과 관심, 사랑 등 모든 것을 정확히 보답한다' '자연에 대한 투자가 제일 수익이 좋다'는 철학이 있었다. 아들 이씨는 이 철학을 아버지 이씨가 수십 년에 걸친 기업인 인생에서 얻은 깨달음이라 여겼다.


아버지 이씨는 자신의 철학대로 주말이면 어김없이 수목원을 찾아가 땅을 일궜다. 묘목을 구하고 재배 기술을 익히는 데 있어 아버지 이씨는 끔찍할 만큼 고집스러웠다. 가이스카 향나무 묘목 3000본을 일본에서 수입해 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국내에서 사들인 가이스카 향나무 묘목 2000본은 행여 그 뿌리가 다칠까 경운기로 일일이 운반해야 했다.


외국 출장을 가서 마음에 드는 나무나 꽃이 있으면 그 씨앗을 어떻게든 꼭 구해서 돌아오는 아버지 이씨였다. 좋은 묘목에 대한 그의 고집은 '집착'에 가까웠다. 한국에 양란이 귀했던 1970년대 말엔 세포 조직배양법을 개발한 일본인 교수를 7번이나 찾아가 그 재배 기술을 배워왔을 정도니, 아버지 이씨의 극성과 집착은 대단했다.


아버지 이씨는 몇 년 전 수목원을 가꾸려 백방으로 뛴 지난날에 대해 "풀 한 포기 잡초 하나 정성이 깃들지 않고 자라는 생명은 없다"며 "손과 발에 직접 흙을 묻히며 일하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베어트리파크는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10만평 초록은행..땀을 예금해놓은 사람 베어트리파크의 설립자인 이재연씨의 아들 이선용씨.


◆부자의 수목원, 모두의 수목원이 되다=철학과 고집으로 수목원을 가꿔 온 부자. 이 부자의 40여년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수목원이 모두에게 문을 열게 된 것도 아버지 이씨의 철학에 따라서였다. 자연이 주는 즐거움을 좀 더 많은 사람이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1989년 송파원은 지금의 베어트리파크의 자리로 옮겼다. 나무며 동물이며 수목원 식구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송파원에 있던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비단 잉어 등을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이 대규모 이사에 쓰인 트럭은 1000대가 넘었고, 이사를 완전히 끝낼 때까지 걸린 기간은 3개월이었다.


2000년대 초, 베어트리파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아버지 이씨는 수목원 개방을 결정했다. 살아서는 자연을 가꾸며 즐기고, 죽어서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으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수목원 개방을 준비하는 과정에선 씻을 수 없는 아픔도 있었다. 아버지 이씨의 부인인 구자혜씨가 나무를 가꾸다 실족해 목숨을 잃은 일이다. 부자와 부부의 인생을 오롯이 담은 베어트리파크는 결국 2009년 5월 그 문을 열었다.


아들 이씨는 "앞으로 자연이 선물하는 즐거움을 많은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는 아버지의 철학을 그대로 이어가려 한다"며 "아버지가 그랬듯 사명감을 갖고 베어트리파크를 일궈나가겠다"고 말했다. 기분 좋게 부는 바람을 타고 이곳에 녹아든 부자의 철학이 전해지는 듯 했다.




연기=성정은 기자 j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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