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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탐욕의 스위치를 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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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탐욕의 스위치를 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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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월 스트리트(Wall Street)의 역사는 1644년에 시작됐다고 한다. 미국이 하나의 국가로 탄생한 것이 1774년의 일이니 그보다 130년 전에 월 스트리트가 먼저 생긴 셈이다. 이야기인즉슨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이 영국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맨해튼 섬 아래쪽에 벽(wall)을 쌓은 데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벽 안쪽에 상점과 건물, 거리가 들어서면서 월 스트리트가 됐고 세월이 흘러 벽은 사라졌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다.


외부의 침공을 막으려는 데서 비롯된 월 스트리트가 지금은 내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침체된 경기, 넘치는 실업자는 아랑곳없이 수백만달러가 넘는 연봉과 성과급으로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는 월가의 금융인들에 분노한 시민들이 나선 것이다.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자(Occupy Wall Street)'는 피켓을 들고 월가를 겨냥하던 시위는 이제 99%대 1%의 대척점을 세우고 '가진 자'에 대한 공격으로 확대됐다.

월가에서 시위가 시작된 지 한 달여가 지나면서 이 같은 서민들의 분노는 전 세계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우리나라 여의도를 비롯해 전 세계 82개 국가, 921개 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졌다고 주최 측의 웹사이트는 전하고 있다.


'은행들이 예금이자는 낮게, 대출 이자는 높게 해서 사상 최대의 순이익을 거두고, 조 단위 배당잔치를 벌이며, 높은 연봉에 거액의 성과급까지 나눠 갖는다' '증권회사는 주가가 오르건 말건 거래수수료를 받아 챙기고, 빚 내서 주식 사도록 부추기면서 높은 이자를 물린다' '카드회사에 내는 수수료 때문에 영세 상인들은 허리가 휘는데 카드사의 이익은 사상 최대다'는 등의 비판에 900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를 짊어지고 있는 서민들이 공분하는 것은 당연하다.

김석동 금융위원회 위원장도 지난 13일 "금융권이 과도한 탐욕과 도덕적 해이를 버려야 한다"며 금융권을 직접 공격하고 나섰으니 금융권은 확실히 아래위로부터 탐욕스런 존재로 낙인이 찍혀 있다. 추악한 '탐욕의 화신'이 되었으니 금융권은 조만간 김 위원장이 요구한 '스스로의 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 내용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배당을 줄이고, 연봉 인상률과 성과급 지급률을 낮추고 대출금리도 조금 내릴 것이다. 미소금융이나 새희망홀씨대출과 같은 서민대출 상품에 대해서도 출연금을 늘리고 대출한도를 올리는 식으로 신경을 쓸 것이다. 이미 카드사는 지난 주말 가맹점 수수료를 내리겠다고 발표했고 신한은행은 배당을 자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일이 처리되고 만다면 지극히 실망스럽다. 기름값, 통신료 깎듯이 배당금이나 수수료 깎는다고 탐욕이 억제되지는 않는다. 높은 연봉이나 성과급이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다. 탐욕을 발동시킨 스위치를 꺼야 한다. 그 스위치는 바로 도덕적 해이다.


키코 사태, 저축은행의 불법대출, 신한금융의 지배구조 갈등, 증권사의 과다한 신용공여 등 금융소비자를 울리고 나라 망신을 시키는 일들은, 이익 더 내고 성과급 더 받자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도덕성이 작동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것이다. 엄포와 여론몰이로 배당금 줄이고 수수료 깎는 데 열중하느라 금융권, 금융인의 도덕성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잃는다면 이 역시 일회성 이벤트에 불과하다.


동인도회사는 원주민에게 유리구슬 몇 알을 건네주고 현재 뉴욕의 중심지인 맨해튼을 차지했다. 원주민은 단순한 선물로 여겼다고 한다. 동인도회사의 이 같은 행위는 좋은 땅을 싸게 사서 대박을 보자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무지한 원주민 따위는 속여도 그만이라는 도덕적 해이 때문일까.






김헌수 기자 khs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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