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개발연구원 조찬 강연회에서 '나의 삶, 영화 이야기' 강연
[아시아경제 이정일 기자] "외국 영화제에 나가서 ‘어떻게 영화 100편을 찍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참으로 난처했다. 초기 50여 편은 ‘가케모치(겹치기)’로 찍어내던 남작(濫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먹고사는 방편으로 영화를 찍었다. 그러다가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한국 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올해로 메가폰을 잡은지 50년이 되는 거장 임권택 감독(사진). 반세기의 험난한 한국현대사를 관통해 그가 걸어온 길은 또 하나의 영화사이기도 하다. '열정' 하나로 영화 현장을 지켜온 그가 기업인들 앞에서 101번째 작품을 산고하기까지 질곡진 삶을 회고했다. 지난 1일 인간개발연구원(회장 장만기)이 주최한 조찬 강연(1707회)에서다.
임 감독은 '나의 삶, 영화 이야기'라는 주제의 이날 강연에서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고비고비를 털어놨다.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년)부터 101번째 작품 ‘달빛 길어올리기’(2011)까지 무려 50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잡초’(1973년) ‘족보’(1979년), ‘짝코’(1980년), ‘만다라’(1981년), ‘씨받이’(1986년), ‘서편제’(1993년), ‘춘향뎐’(1999년), ‘취화선’(2002년), ‘천년학’(2007년) 등 숱한 화제작을 낳았다.
"빨치산 출신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시달리던 내가 처음 외국에 나간 것은 ‘증언’(1974년)이었다. 대만에서 열리는 아태영화제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당시 세계는 가난, 분단, 전쟁, 독재의 나라 한국에 관심이 없었다. 나 역시 평소부터 기회만 되면 일본으로 이민을 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임 감독의 생각은 이내 바뀌었다. '세계에서 버림을 받은 이 나라'를 그마저 버릴 수 없다는 연민 때문이었다. 이 나라는 그의 뿌리였고, 삶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철학이 자리를 잡았다.
남에겐 별다른 풍경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임 감독에게 강산 곳곳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었고, 이를 영화에 오롯이 담아냈다. ‘만다라’가 관심을 받더니 강수연(씨받이), 신혜수(아다다)씨가 세계적 영화제에서 잇따라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영화 '서편제'는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판소리를 영화로 찍겠다는 '평생의 꿈'에 이끌려서 시작된 작업이지만 그 깊은 소리의 울림을 화면에 담는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그런데도 일이 술술 풀렸다. 임 감독은 "적절한 장소를 찾지 못해 막막해 할 때도 조금만 이동하면 좋은 장소가 나타났다. 귀신이 데려다준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한국의 소리'를 스크린에 담은 서편제는 국내 최초 100만 관객 돌파의 기록을 세웠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춘향뎐’에 이어 ‘취화선’으로 마침내 칸영화제 감독상을 품에 안았다.
임 감독은 "모험과 도전이야말로 지금까지 나를 살아있게 하고, 최근까지 작업을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자평했다. 이는 ‘임권택은 시행착오의 대가’라는 평론가들의 평가와 맞닿는다. 그는 "영화 인생을 끝낼 때까지 스스로 만족하는 영화는 만들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완성을 향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며 도전하는 삶을 강조했다.
이정일 기자 jay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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