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대구육상 그림자②]한국 육상, 호랑이에 물리다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0분 47초


[대구=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원대한 목표. 하지만 꿈이었다. ‘10개 종목 톱 10 진입’은 경보와 멀리뛰기, 두 종목에 그쳤다. 기대를 모은 남녀 마라톤은 20위권 밖으로 뒤처졌다. 집중 육성 종목으로 선정한 남녀 장대높이뛰기, 남자 창던지기, 여자 멀리뛰기 등도 모두 예선에서 탈락했다. 세계의 벽은 높았고 선수들의 실력은 한참 모자랐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은 4개 종목 한국기록 경신을 위안으로 삼는다. 경보의 박칠성, 남자 10종 경기의 김건우, 남자 1,600m 계주, 남자 400m 계주 등이다. 하지만 저조한 성적에 대한 책임론은 피할 수 없다. 목표 설정에서부터 과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10개 종목 톱 10 진입’은 객관적인 기록상 무리였다. 대회 전 선수, 코치들의 생각 또한 그러했다. 한 선수는 “성적이 나오지 않을까 부담이 된다”며 “벌써부터 대회 뒤가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다른 선수도 “집중 육성 종목으로 채택됐다지만 실제로는 그리 많은 지원을 받지 못했다”며 “대한육상경기연맹이 목표를 너무 높게 잡은 것 같다”고 걱정했다.


오동진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은 지난달 31일 스포츠투데이와 인터뷰에서 무리한 설정에 대해 변명을 내놓지 않았다. 참패를 깨끗이 인정했다. 그는 “열심히 준비했지만 직접 본 세계의 벽은 예상대로 상당했다. 역부족이었다”면서도 “선수들이 목표를 크게 잡고 열심히 싸워주길 바랐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더 나은 성적도 가능하다고 믿었다”고 밝혔다.

그는 2009년 취임 이후 외국인 코치 영입, 해외 전지훈련 등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육상 체질 개선에 힘썼다. 노메달 개최국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됐고 한국육상은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중국, 일본의 선전에 침체는 더 부각되기까지 했다. 두 나라는 각각 여자 원반던지기(리얀펑), 남자 해머던지기(무로후시 고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일본은 한국선수단이 노린 남자 마라톤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얻기도 했다.


오동진 회장은 대표팀의 침체 이유로 노쇠화를 손꼽았다. 그는 “차세대 주자 발굴에 실패했다. 2006 도하 아시안게임부터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이 이번 대회에서도 주축을 이뤘다”며 “부상선수를 끌고 와서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어 “유망주를 조기 발굴해야만 육상 선진국과 격차를 좁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2년 전 베를린대회 때도 거론됐던 문제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은 유소년 발굴 및 육성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건 목표는 달랐다. 육상강국 대열에 막 합류할 듯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국민들에게 전달한 기대감은 막연했고 이는 이내 큰 실망감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획득한 한 선수는 “‘10개 종목 톱 10 진입’은 10년 이상이 지난 뒤에나 내다 볼 수 있는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육상은 막 외국인코치를 데려와 선진기술을 전수받는 단계에 불과하다”며 “대한육상경기연맹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코앞으로 다가온 대회에 눈이 멀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집중 육성 종목의 한 선수는 지원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대한육상경기연맹이 많은 투자를 한다고 언론을 통해 알렸지만 실상은 달랐다”며 “아직 경제적인 걱정 없이 훈련을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선수들 역시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한 육상 관계자는 “최근 5천만 원 이상의 연봉을 받는 시군구청 선수들이 늘어났다”며 “대부분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데만 신경을 기울인다.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에 담을 쌓은 지 오래됐다”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도 “선수 대부분이 육상에서 박태환, 김연아와 같은 선수가 나오길 바란다”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깊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혀있다”고 꼬집었다.


오동진 회장은 이번 대회가 인식의 전환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그는 “국내 400여 지도자들과 대표 선수들이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시각 자체가 많이 달라졌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2009 베를린대회 당시 그는 총체적인 매너리즘의 개선을 위해 칼을 뽑아든 바 있다. 스테파니 하이타워 미국육상연맹 회장을 만나 외국인 지도자 영입을 시도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꾀했다. 노력은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빛을 발휘하는 듯했다. 하지만 1년 뒤 부딪힌 세계의 벽은 그 이상이었고 한국육상은 다시 한 번 제 위치를 확인하게 됐다.


오동진 회장은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가진 스포츠투데이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스스로 내릴 수 없다. 나아길 길을 전진해야만 한다”며 “그 속도를 늘리려면 ‘나부터 변화’를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결국 스스로 창피를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육상은 초라한 성적을 남기며 끝내 호랑이에게 물리고 말았다. 막대한 출혈과 상처. 하지만 여기에는 긍정적인 요소도 숨어있다. 부담이 사라졌다. 무작정 속도를 늘리지 않아도 되고 나아갈 길만을 전진할 필요도 없다. 호랑이의 공격 성향까지 대략 파악했다. 하지만 당장의 전망이 밝은 건 아니다. 안타깝게도 2012 런던올림픽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이번 대회를 도약의 발판이자 출발점으로 삼기에 시간은 너무 촉박하다.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아시아경제 & 재밌는 뉴스, 즐거운 하루 "스포츠투데이(stoo.com)">

이종길 기자 leemean@
<ⓒ아시아 대표 석간 '아시아경제' (www.newsva.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