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영식 기자] 일본 엔·달러 환율이 역대 최저 기록을 갈아치웠다. 미국 경기 둔화 우려와 유럽 재정적자 위기로 세계경제 침체 공포가 커진 가운데 연일 고공행진하는 엔화 가치가 결국 2차대전 이후 최고치의 벽을 넘어선 것이다.
19일(현지시간) 뉴욕외환시장에서 엔·달러환율은 개장 초반인 오전 10시20분 전일대비 0.62% 하락한 76.11엔으로 내려 3월 대지진 당시 세운 최저 기록 76.25엔을 넘어섰으며 이어 75.93엔까지 떨어지면서 76엔선이 깨졌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날 엔화가치 급등의 원인은 투기성 매수·매도 움직임에 따른 것이라고 전했다. 이날 뉴욕 개장 초반 일본 재무성 고위급 관계자가 환율 개입에 소극적인 자세를 나타낸 것으로 전해지면서 “일본 외환당국이 즉시 외환시장에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다”는 판단에 엔화 매수가 급격히 늘어 단번에 75엔대까지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속 매수 움직임이 나오지 않고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BOJ)이 긴급대책을 검토중이라는 보도도 나오는 등 추가 개입에 대한 경계감이 커지면서 차익실현을 위한 엔화 매도세가 나왔고 다시 엔·달러 환율이 76엔대 중반을 회복했다. 거래를 마친 오후 5시 현재는 달러당 76.49~76.59엔 대를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방어선으로 간주됐던 전후최고치 기록이 깨지면서 일본 정부와 BOJ가 다시 외환시장 개입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앞서 18일 일본 외환정책 최고실무책임자인 나가오 다케히코 재무관과 나가소 히로시 BOJ정책이사는 엔고 대응을 위한 긴급 회의를 열었고 노다 요시히코 재무상도 “계속 시장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으며 외환 시장 개입은 시장을 놀라게 할 정도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밝혔다. 레이 애트릴 BNP파리바 외환투자전략책임은 “엔·달러 환율 동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일본 외환관계자들의 발언은 BOJ의 실제 개입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블룸버그가 집계한 주요 10개국의 통화바스켓 기준 환율지수(correlation-weighted currency index)에서 엔화가치는 최근 3개월동안 5.5% 절상되면서 12% 가까이 절상된 스위스프랑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상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같은 기간 달러는 1.7% 절하됐다.
앤드루 윌킨슨 인터랙티브브로커스그룹 선임 시장애널리스트는 “미국과 유럽 재정불안에 따른 세계 경제 둔화가 글로벌 증시에 압력을 키우고 있으며 엔화 강세로까지 이어진 것”이라면서 “엔고 현상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며 많은 요소가 얽혀 있다”고 지적했다.
오는 28일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미 와이오밍주에서 연례 경제정책 심포지엄 ‘잭슨홀 미팅’에서 연설할 예정인 가운데 추가 부양책의 윤곽이 드러나면 엔화 절상압력은 더욱 커지게 된다. ‘글룸,붐 앤 둠’ 리포트로 유명한 월가의 대표적 비관론자 마크 파버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버냉키 의장이 국채 매입 규모를 확대하는 등의 정책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브라이언 김 영국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 외환투자전략가는 “외환 시장에서 여전히 안전자산으로의 도피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면서 “투자자들이 곧 예정된 버냉키 의장의 연설까지 경계를 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식 기자 g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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