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백희영 여성가족부 장관과의 면담
[아시아경제 이상미 기자]"지진이 났을 때 어디 계신지 못 찾아서 한국에서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백희영 여성가족부 장관이 고국을 방문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송신도(90)할머니에게 건넨 첫마디다. 미야기현에서 거주하던 할머니는 지난 3월 11일 일본대지진 당시 6일간 연락이 끊겨 많은 이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도, 쓰나미 재해 현장에서도 살아남은 송 할머니는 그저 담담하게 "죽지 않고 살아서 다행"이라고 답했다.
1922년 대전에서 태어난 송 할머니는 16살 때 중국 무창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그로부터 7년간 전쟁터에서 그녀는 무수한 일본군인을 상대해야 했지만 일본이 패전하자 위안부들은 거리에 버려졌다. 그때 한 일본군이 결혼해서 함께 일본에 가자고 제안해왔다. 달리 갈 곳이 없던 그녀는 그 말을 믿고 일본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하카다 항구에 도착하자 말을 바꾸었다. 일본에도 미국사람이랑 군인들이 있으니 그 군인들을 상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송 할머니는 "내가 위안부였다는 걸 아니까 결국 미국인하고도 그렇게 해서 살아가라는 뜻 아니겠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할머니는 '나를 이렇게 짐짝 취급하려면 왜 나를 중국에서 데려왔냐'며 필사적으로 그를 쫓아갔지만 결국 도쿄 우에노에서 버림받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귀국 증명서가 들어있는 가방까지 도둑맞자 송 할머니는 절망한 나머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이후 일본에서의 생활은 늘 어려웠다. 국민연금법과 귀국자 보상법의 적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송 할머니는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었다"면서 "생선가공 공장, 도로공사 현장, 술집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늘 따라다녔다"고 회고했다.
2011년 현재 생존해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총 70명으로 그중 8명이 미국, 일본, 태국, 중국 등 국외에 체류하고 있다. 송 할머니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유일한 생존자다.
이들 대부분은 송 할머니처럼 해방 후에도 위안부 피해자라는 자책감과 고국의 무관심 등으로 귀국을 포기하고, 체류 국가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 의료보험 등 최소한의 사회보장 서비스도 받지 못한 채 가난과 차별 속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살아왔다. 현재 여성가족부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매달 90만8000원의 생활안정지원금과 간병도우미 비용 등을 지원하고 있다.
송 할머니에게는 아직 포기할 수 없는 꿈이 남아 있다. 그는 아흔의 나이에도 정정한 목소리로 "일본정부로부터 사죄를 받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며 "일본정부의 외면과 한국정부의 무관심에 맞서 절대로 지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송 할머니는 지난 1992년, 반세기에 걸친 침묵을 깨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제기해 유명세를 탔다. 비록 할머니의 사죄요구는 최고재판소까지 모두 기각됐지만, 많은 이들이 10년의 재판과정에서 할머니와 함께 싸웠다.
송 할머니는 "재판에서는 졌지만 내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말로 끝까지 싸우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송신도 할머니는 지금도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두 번 다시 나와서는 안된다"며 "다시는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고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계속 호소하고 있다.
이상미 기자 ysm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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