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쓰고, 안 먹고, 안 사면 돼요. 길거리 매대에서 싸구려 티셔츠 사 입고, 신발은 한 두 개로 사 계절 버티고, 점심은 구내식당이나 분식 같은 거로 때우고.” “어떻게 이렇게 알뜰하게 돈을 모을 수 있었느냐”고 은행 직원은 그저 고객 응대 차원의 덕담을 던졌을 뿐인데 연재(김선아) 씨는 마치 고시 패스한 아들 뒷바라지 해온 중년의 어머니 모양 푸념어린 하소연을 줄줄이 늘어놓았습니다. 급작스런 눈물 바람에 당황스러워하는 은행원 아가씨의 화사한 얼굴빛이 연재 씨의 표정과 대조를 이뤄서 그 슬픔이 몇 배는 더 처연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꼬불꼬불한 파마머리에 뿔테 안경, 추레한 차림새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가슴이 답답하더군요. 2000만 원 남짓한 연봉으로 3200만원을 모으려면 대체 얼마나 조이고 또 조였어야 하는 겁니까? 더구나 적금 통장이 아직 두 개나 더 있다면서요? 내년쯤에는 결혼도 하고, 차도 사고, 5년 뒤 쯤에는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도 가고, 그러고 싶어서 아끼고 참으며 살았다지만 서른넷이라는 나이에 시한부 6개월 판정을 받은 마당이니 그야말로 도루아미타불이 된 거잖아요.
연재 씨가 허비한 세월이 너무 아까워서 화가 났어요
저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황보다 억울해 죽겠다는 소리를 생판 남인 은행 직원 앞에서 밖에 할 수 없는 처지인 게 더 안쓰러웠습니다. 억장이 무너지게 생겼건만 딱히 붙잡고 통곡할 사람 하나 없었으니까요. 그간 그처럼 아끼고 살았으니 친구도 변변히 만났을 리 없고, 상사에게 처절하게 당해도 편들어주려고 나서는 동료 또한 없는데다가, 더욱이 만년 소녀 같은 철없는 어머니(김혜옥)야 의논 상대가 될 리 없으니 말이에요. 어디다 속내를 털어 놓을 길이 없는 연재 씨는 결국 아버지 산소를 찾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요. 그토록 딸이 빚은 만두 하나를 드시고 싶어 하다가 끝내 마지막 소원을 못 이루고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남기셨던 말씀, 기억날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며 더 많이 먹어두는 건데, 여행도 더 많이 다니고, 사랑한단 얘기도 더 많이 하고. 연재야, 넌 이 아빠처럼 살지 마.” 그럼에도 아버지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은 채 십여 년을 보낸 후 아버지 앞에서 “남들은 집도 물려주고 재산도 물려주고 그러던데 왜 아빠는 하필 암 같은 걸 물려주느냐,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라고 악에 받힌 원망을 쏟아놓게 된 연재 씨.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옆에서 지켜봤던 연재 씨가 왜 그런 미련한 삶을 살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더 기막힌 건 급기야 여행을 떠날 결심을 하고 난 다음이었어요. 건강이 나빠져 최근 체중이 많이 줄긴 했다지만 안경을 벗고 새 옷을 입고 머리며 치장을 한 것만으로도 지나가는 남자들이 돌아볼 정도의 외모가 된 거잖아요? 그러니 이 얼마나 안타깝고 아까운 일이냐고요. 금융기관에서 표창장을 줘야할 만한 소비습관이긴 했지만 자기 자신을 돌보고 가꾸는 데에도 현명하게 투자를 했다면 상사가 그렇게 대놓고 멸시와 질책을 할 수는 없지 싶어요. 연재 씨가 허비한 십여 년의 세월이 너무 아까워서 이번엔 답답함을 넘어 화가 났어요.
연재 씨의 버킷 리스트를 보는 순간 뜨끔했습니다
그리고 그 화살은 자연스레 어머니를 향하게 되더군요. 하나뿐인 딸이 그렇게 사는 동안 어머니는 뭐하셨대요? 솔직히 연재 씨가 악착같이 돈을 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다 어머니 때문이 아닌가요? 평생 부모며 남편 그늘 아래 살다가 이젠 딸을 남편처럼 의지하며 사시게 된 어머니가 연재 씨에게는 책임이자 의무였을 게 분명하니까요. 눈치는 왜 그리 없으신지 딸이 급작스레 살이 빠졌어도 나 몰라라, 평생 안 하던 여행을 떠나도 나 몰라라, 철없는 선물 타령에 특히나 딸이 떠나 있는 동안 집은 난장판에다가 음식물 쓰레기 처리도 미뤄뒀다는 사실이 어찌나 한심하던지, 연재 씨 못지않게 저도 울화가 치밀더라고요. 가장 한심했던 건 살뜰한 위로와 간호를 받아야할 시한부 인생의 딸이 환갑도 안 된 어머니의 노후 대책을 마련해두는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말이죠. 연재 씨가 버킷 리스트에 적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스무 가지’, 첫 번째 항목 ‘하루에 한 번씩 엄마를 웃게 하기’를 보는 순간 가슴이 뜨끔하더군요. 연재 씨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스무 가지’라고 써내려가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난 별로 하고 싶은 게 없는데?’하며 심드렁하니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홀로 지내시는 양가 어머님들 생각을 며칠 씩 안하고 지내는 적이 허다한 제가 어찌나 부끄러운지 모르겠어요.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고졸로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만든 무능한 어머니를 끊임없이 원망도 할 법도한데 원망은커녕 혼자 남으실 어머니를 가장 먼저 떠올리고 걱정하는 연재 씨의 마음 씀씀이가 태산처럼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요. 어떤 삶이 현명한지는 정답이 없지 싶어요. 아끼고 또 아끼며 살든, 턱없이 즐기며 살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만이 후회를 덜 남기겠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남의 원망을 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연재 씨의 삶은 꽤 괜찮은 삶입니다. 앞으로 정말 6개월만 살 수 있을지, 아니면 좀 더 이어질지, 어느 누구와 어떤 인연을 맺을지 알 수는 없지만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 좋은 사람으로 살아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발,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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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10 아시아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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