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평소 존경하던 선배가 저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버린 건지 확인하다가 저는 이 오해라는 것이 막아내기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단 작은 의심이 시작되자 그 분에겐 모든 것이 이상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처음엔 답답하고 억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내 적지 않은 공포감이 밀려왔습니다. 그 오해는 대체 어디까지 퍼져 있을까, 얼마나 계속될까. 다른 사람들도 여러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낯설어 보였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한동안 가벼운 대인기피증을 앓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기업의 명성(reputation)은 오랜 세월의 투자와 일관된 활동을 거쳐 만들어지고, 고객의 구매의도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경쟁기업이 모방하기 어렵고 큰 가치를 창출하는, 이른바 핵심 역량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명성은 매우 결정적 약점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식품이나 의약품 분야에서 기업이 쌓아온 명성이 한 번 발견된 이물질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진 사례를 자주 봅니다. 품질 관리에서 명성을 쌓으면 쌓을수록 오히려 작은 결함에도 큰 타격을 입는다는 역설이 성립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전전긍긍합니다. 기업들은 그동안 언론 보도를 주의 깊게 살피고 또 영향을 미침으로써 자신의 명성에 가해지는 위협을 통제하고자 시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보 유통에 기업이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상시적으로 정보망에 접속해 있는 수많은 소비자들은 정보의 수용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로서 정보를 주고받고 있고, 그 유통 속도 또한 매우 빠릅니다. 어떤 뉴스가 어디서부터 어떤 속도로 퍼져나갈지 예측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것입니다.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려는 기업에 이것은 매우 나쁜 환경이지만 기회주의적인 소비자들에게는 좋은 환경입니다. 음식에서 머리카락을 발견한 고객은 자신에게 수천명의 팔로어가 있다는 점을 이용하고 싶은 충동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휴대전화가 폭발했다고 속여 거액을 요구한 소비자, 규정보다 일찍 단종된 부품을 일부러 주문하면서 보상을 요구하는 소비자. 이런 사례는 어디서나 찾을 수 있습니다. 고객은 왕이며, 무조건 만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기업은 이런 약삭빠른 왕들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지요.
기업의 이런 고민을 광범위하게 연구한 미국 텍사스대학의 연구팀은 최근 한 논문에서 기업들이 공포를 떨쳐버려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설령 기업의 잘못이 있다고 해도 정해진 기준을 지키지 않는 고객에게 과도한 서비스로 보상하지 말라고도 합니다. 불량품 교환절차를 무시하고 난동부터 피우는 고객에게 굽실거리는 대신 단호하게 매장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이 다른 고객들에게 더 긍정적 인상을 심어준다는 것이지요. 필요하다면 규정이나 대응 요령을 바꿔야 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선의의 고객이 악의적인 고객보다 덜 대접받는다고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물론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연구의 제안처럼 기업이 악의적인 고객에게 단호하게 대응하려면 "소문은 빨리 퍼지나 진실이 더 오래간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오해로 인해 일정 기간 사업이 타격을 받더라도 말이지요.
박인환 시인은 '목마와 숙녀'라는 시에서 우리가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간다'고 한탄했습니다. 잠시 고립된다 하더라도 원칙을 지켜내는 것. 무성한 뒷담화를 견디고 묵묵히 걷는 것. 결코 만만치 않은 숙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기업에도, 개인에게도.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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