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성정은 기자]"당신의 위험한 생각은 무엇입니까?"
리처드 도킨스, 클레이 서키, 칙센트미하이, 재레드 다이아몬드 등 100명이 넘는 세계의 석학들이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치열하게 나눴다. 사회학자, 철학자, 과학자, 심리학자, 종교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이 모인 만큼 그 생각도 다양했다. 이 다양한 생각들이 한 데 묶여 나온 책이 '위험한 생각들'이다.
내로라하는 석학들을 한 자리에 모은 건 '지식의 지휘자'로 불리는 존 브록만(John Brockman)이다. 그는 과학, 예술을 비롯한 각 분야의 지식인들이 모여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맞았다. '엣지 포럼'에 모인 전혀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은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나누며 매년 '모든 것을 바꿀 그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마음을 바꾼 그 무엇', '낙관적 생각들'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한 '지식'을 내놓았다. 이 지식들은 책으로 묶여나올 때마다 대박이 났다. 존 브록만을 세기의 출판기획자로 만들고, 그를 돈방석에 오르게 한 비결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면 혁신을 이뤄낼 수 있다'는 존 브록만의 생각은 출판계에서만 통하는 건 아니다. 기업에서도 똑같다. 페이스북의 설립자 마크 주커버그는 존 브록만과 같은 생각으로 전세계 6억명의 흥미를 끌어당겼다. 주커버그는 '모든 일은 리더인 나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직원들 스스로가 의견을 내고 그 의견을 토대로 일을 진행해나갈 수 있도록 했다. 직원들이 하나의 주제에 의견을 내고 이 가운데 좋은 의견을 추려 일을 끝마치도록 격려하는 일은 의외로 간단했다. 자유로운 분위기 아래 토론하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걸로 충분했다.
페이스북에서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기면 개발, 디자인, 기획 실무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일에 관한 얘기지만 분위기는 일반적인 회의와 사뭇 다르다. 피자와 콜라, 스낵 등을 먹고 마시며 파티를 하듯 토론을 이어간다. 페이스북은 이 즐거운 회의를 '핵카톤(hackathon)'이라 부른다. 새 프로젝트를 해야 할 때면 어김없이 핵카톤이 열리고, 여기서 페이스북의 창조가 시작됐다.
핵카톤은 해킹(hacking)과 마라톤(marathon)의 합성어로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아이디어 회의를 뜻한다. 해킹은 원래 다른 컴퓨터에 침입해 데이터를 파괴한다는 부정적인 뜻을 가지지만, 페이스북에서는 이 해킹을 '창조'를 의미하는 크래킹으로 받아들였다. 마크 주커버그는 상식을 깬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것을 페이스북의 사업 목표로 삼고 핵카톤을 시작했다. 회의는 때때로 며칠이 지나서야 끝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마라톤이란 말이 붙었다. 핵가톤은 하나의 프로젝트에 대해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충분히 나눈 뒤에야 끝난다. 앉은 자리에서 끝을 내는 이른바 '끝장 토론'인 셈이다.
기업에서 일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초짜 경영인, 마크 주커버그가 전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ㆍSocial Network Service)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대학에서의 경험 덕분이었다. 그는 하버드대학 기숙사 시절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면 같은 방에 있는 친구와 이를 나누고, 옆 방에 있는 다른 친구들과도 토론했다. 기숙사에서 벌어진 회의는 간단한 음식을 먹으면서, 지칠 땐 침대에서 쉬기도 하면서 계속됐다. 한 번 시작된 토론은 끝이 날 때까지 이어졌다. 아이디어가 모이면 새로운 무언가를 개발하고 테스트가 성공하면 즉석 파티가 열렸다.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는 조직 문화를 원했던 마크 주커버그는 기숙사 토론 방식을 페이스북에 그대로 적용해 성공을 이뤄냈다. 현재 페이스북 가입자는 6억6491만명에 이른다.
품질혁신과 고객만족을 목표로 하는 기업 경영전략인 '식스 시그마'를 내세운 기업들이 최근 고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페이스북의 '핵카톤 문화'가 국내 기업에도 번지는 분위기다. 취임 뒤 매일 아침 임직원들과 식사를 하며 의견을 듣고, 현대중공업 등을 방문해 '고객의 소리'를 직접 듣는 등 소통의 리더십으로 조직을 이끈다는 평가를 받는 정준양 포스코 회장이 그 대표 주자다. 포스코는 2009년 본사에 300평 규모의 창의공간 '포레카'를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유명한 한 마디 '유레카'와 '포스코'를 합해 만든 '포레카'에서 직원들이 예술 활동, 독서, 산책, 자유토론을 즐기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정 회장의 구상이다.
LS전선에도 포스코와 비슷한 창의 공간이 있다. 경기도 안양에 있는 LS전선 본사 직원들은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면 14층을 찾는다. '상상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면 게임을 하거나 DVD플레이어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펼쳐진다. 제조업의 특성상 규율을 강조하는 경직된 분위기를 창의성과 감수성을 자극할 수 있는 분위기로 바꾸겠다는 회사 측의 의지가 엿보인다.
김재원 삼성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핵카톤'이란 말은 해커들이 어떤 과제를 함께 푸는 과정에서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교류한 데 그 어원이 있다"며 "외국에선 이미 이 '핵카톤 문화'가 기업뿐만 아니라 공공 조직, 학생들 사이에도 많이 퍼져 있다"고 말했다. 김 선임연구원은 이어 "최근 들어 국내 기업, 공공 조직 등도 '핵카톤'에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다"며 "자유롭게 의견을 공유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서 혁신과 변화를 이끌어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성정은 기자 j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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