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인은 다음 행동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 걸어 놓은 백스크린을 향해 돌진하고, 인터뷰 중간 질문과 무관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엉뚱함은 방심하고 있던 상대를 바짝 긴장시킨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기를 유지한 스물한 살의 젊음, 진중한 목소리로 옛 노래를 부르던 낯가림 심한 싱어송라이터만 상상했다간, 툭툭 농담을 던지며 그 나이 또래의 청춘이 그렇듯 별것 아닌 일에도 크게 웃는 소녀 장재인을 놓치고 만다.
그러나 동시에 장재인은 무슨 질문을 건네도 흔들림 없이 자신이 세워 놓은 길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대답할 줄 안다. 마치 자신은 음악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사람인 것처럼, 조금이라도 자신의 음악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훼손되는 것을 꺼리는 듯한 장재인의 태도는 조심스러운 동시에 강철처럼 단단하다. 그래서 장재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말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달의 뒷면을 봤다고 해서 그것이 달의 전부를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예측 불허의 엉뚱한 소녀 장재인과 강철 같은 신념의 싱어송라이터가 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장재인이 어떤 사람인지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녀의 음악을 듣는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자신이 하고 싶던 이야기를 표현하는 도구로 음악을 선택한 그녀에게 음악은 공기나 언어처럼 너무도 당연한 존재다.
그래서 장재인에게 어떤 영화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긴 고민 없이 꺼낸 테마가 ‘음악이 아름다운 영화들’이란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해서 결국엔 영화에 흐르는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로 회귀하는 그녀의 어법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골라 준 영화들이 모두 예상 가능한 영화들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비틀스 마니아인 장재인이 비요크의 어둡고 음산한 보이스컬러의 아름다움을 예찬할 때, 흥분한 그녀의 생각은 말의 속도를 추월한다. 잘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장재인은 다시 의외의 모습으로 새롭게 돌아온다. 다음은 그녀가 추천한 음악이 아름다운 영화들이다.<#10_LINE#>
1. <아이 엠 샘> (I Am Sam)
2001년 | 제시 넬슨
“이 영화를 고른 거는 제가 비틀스 팬이라서 그런 것도 당연히 있어요. 하지만 그런 거를 다 떠나서라도 <아이 엠 샘> 영화음악은 다들 인정하실 거예요. 사운드트랙이 정말 최고잖아요. 비틀스의 음악을 그런 식으로 상쾌한 느낌으로 편곡해 냈다는 것도 정말 대단해요. 게다가 그렇게 뽑아낸 노래들이 각 장면마다 너무 잘 어울리는 것도 대단해요. 넘어감이라고 해야 하나? 노래 한 곡 한 곡이 기분 좋게 넘어가는 거 같아요.”
지적 장애를 지닌 아버지보다 머리가 좋아지는 게 싫어 일부러 학교 수업을 게을리 했던 딸과, 딸을 되찾고자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 자칫 신파처럼 느껴질 수 있는 설정은 숀 펜과 다코타 패닝의 열연과 비틀스의 명곡들을 만나 아름답고 섬세하게 묘사된다. 영화의 또 다른 주연은 비틀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재적소에 흐르는 비틀스의 음악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부드럽게 감싼다.
2.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Across The Universe)
2007년 | 줄리 테이머
“어쩐지 또 비틀스 음악이 들어간 영화를 뽑게 되었는데, <아이 엠 샘>하고는 다르게 뮤지컬적인 요소가 많았어요. 극 중 상황과 비틀스의 가사가 완전히 맞아떨어지는데, 그런 식의 접근이 재미있더라고요. 비틀스의 노래들이 대사를 대신하는 거잖아요. 정말로 절망 끝에 부르는 ‘Let It Be’라고 생각해 보세요. 편곡은 <아이 엠 샘>에서보다는 좀 더 하드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비틀스를 풀어냈다는 게 정말 재미있었지요.”
‘비틀스의 노래를 마음껏 사용하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꿈만 같은 제안을 받은 줄리 테이머 감독은 비틀스의 노랫말들이 대사처럼 흘러나오는 주크박스 뮤지컬을 완성했다. 1960년대 뉴욕, 젊은이들은 사랑에 빠지고, 베트남전에 휩쓸리고, 반전 시위에 앞장서며 서로를 오해한다. 시대는 불안정하고 젊음만이 영원할 것 같던 시절, 비틀스의 음악으로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는 이야기.
3. <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
2009년 | 마크 웹
“첫 장면부터 음악이 영상하고 참 잘 어울렸죠. 영화가 영상부터 시작해서 표현 방법들이 참 독특하잖아요. 레지나 스펙터의 인디적인 느낌이 약간은 빈티지한 느낌의 영상에 잘 맞았던 거 같아요. 레지나 스펙터의 음악이 흐르면서, 피아노가 반복적으로 리듬을 치는 동안 화면에선 남녀의 사진이 대비되는 장면도 그렇고. 독특한 영상이 그렇게 맛깔나는 독특한 음악들과 잘 만나서 영화의 느낌들이 더 살았던 것 같아요.”
돌이켜 보면 지긋지긋한 것들이 왜 그때는 천생연분인 서로를 만나게 해주기 위한 징표처럼 보였을까. 영화는 주인공 톰(조셉 고든 래빗)과 썸머(주이 데샤넬)의 연애를 시간순으로 쫓아가는 대신, 행복했던 시간대와 서로가 끔찍하고 불편한 시간대를 넘나든다. 시간 순서가 아닌, 모든 연애 감정들이 시작됐다가 빛이 바래는 과정 속에서 마음의 흐름을 담아낸 영화.
4.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
2000년 | 라스 폰 트리에
“새벽에 자다가 일어나서 TV를 켰어요. 그런데 때마침 보려고 했던 영화가 하고 있더라고요. 공장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장면은, 조금은 공포스럽고 어떻게 보면 기괴한 공장의 기계음들이 흘러나오는데, 영상도 칙칙한 느낌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요소들이 잘 어우러져서 비요크의 목소리하고 조화를 이루는데, 그런 뮤지컬적인 요소가 너무 좋았어요. 사운드도 정말 훌륭했던 거 같아요. 다시 생각해 봐도 참 좋은 영화였어요.”
빛을 서서히 잃어가는 셀마(비요크)에게 무엇보다 간절한 것은 자신을 닮아 시력을 잃어가는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이다. 낯선 미국 땅에서 공장 노동을 버티게 해 주는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뮤지컬에 대한 꿈. 그러나 마치 환각처럼 찾아오는 뮤지컬에 대한 환상은 그녀가 처한 현실의 삭막함과 비참함을 더 강하게 일깨워 준다.
5. <미러마스크> (MirrorMask)
2005년 | 데이브 맥킨
“음악 하는 언니가 보여준 유투브 동영상을 보고 알게 된 영화에요. 로봇들이 여자를 화장해주고 옷을 갈아 입혀주면서 카펜터스의 ‘Close To You’를 부르는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그 화음하며 기계음들이 완벽하게 맞물려서 돌아가는 게 정말로 최고였어요. 어쩌면 그렇게 편곡을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몽롱하면서 깨끗하게 편곡을 했더라고요. 그 장면을 보고 반해서 영화를 제대로 봐야겠다 싶어서 찾아서 봤어요. 영화의 색채도 아름답고 몽환적이고 좋았는데, 역시 ‘Close To You’를 부르는 장면이 제일 좋아요. 하하.”
서커스단에서 자란 소녀에게 지루한 현실은 견뎌내야 할 대상이다. 방에 그려 놓은 낙서 같은 세계 안으로 소녀가 들어갔을 때, 위험한 상황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소녀가 감당해야 했을 현실의 무게가 더 위험했기 때문은 아닐까. 데이브 맥킨은 펜과 붓, 그리고 컴퓨터그래픽으로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빛깔로 영화를 채색하며 환상의 세계를 그려냈다.<#10_LINE#>
“<슈퍼스타 K 2>에서의 제 모습은 진짜 제 모습은 아니었어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무대가 아니었잖아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에 대해 단호하게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고 말하는 장재인은 그러나 좀처럼 자신을 쉽게 보여주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다. 마치 달이 제 뒷면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여전히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도구는 그녀의 음악이다. 날씨가 따뜻해 질 무렵 발매될 그녀의 새 EP 앨범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눈을 반짝거리며 “다 정해놨지만 아직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마치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하는 장난꾸러기의 표정과도 같은 그 눈빛 안에 단단하게 뭉쳐 있는 즐거움이 보였다. 의외의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깜짝 놀랄 거라고 장담하는 듯한 그 눈빛은, 스물한 살의 소녀의 것이었다. 아직 장재인에겐 보여줄 모습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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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이승한 fourteen@
10 아시아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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