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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포럼] 매뉴얼 안지킨 '구제不能' 대책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20초

구제역 실패 '지침' 무시한 탓
확산 방지 정부·국민 힘 모아야


[사이언스포럼] 매뉴얼 안지킨 '구제不能'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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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축산 농가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던 구제역 파동이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돼지고기와 우유 값이 치솟는 것은 오히려 작은 문제다. 전국적으로 4600여곳에 이른다는 매몰지가 끔찍한 환경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330만마리의 소와 돼지, 600만마리의 닭과 오리가 무차별적으로 매몰됐다. 도대체 어떤 일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으로 벌어지게 될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든 1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정부가 구제역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소말리아 해적, 극한적인 여야 대치, 치솟는 물가도 모자라 개헌 문제까지 들먹이는 사이에 사태가 이렇게 악화돼 버린 것이다. 구제역이 힘없는 농림수산식품부와 지자체에만 맡겨 버리기에는 너무 어려운 난제(難題)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작년 봄의 성공적인 구제역 퇴치 경험도 정부의 안이한 대처에 한몫했을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정부의 책임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 너무 가혹하고 지나치다는 '매뉴얼'의 경우도 그렇다. 선진국이라고 근본적으로 다른 매뉴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01년 구제역으로 홍역을 앓았던 유럽의 매뉴얼도 근본적으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1월과 4월 파주와 청주에서 발생했던 구제역의 경우에는 우리 매뉴얼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구제역의 치료법과 확실한 확산 차단 방법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매몰 처리 이외에 뾰족한 대안은 없다. 다만 어느 범위의 가축을 매몰할 것인지는 구제역 차단 가능성과 경제적 부담을 고려해서 선택된다. 범위를 너무 좁히면 경제적 부담은 줄어들지만 차단 효과를 보장하기 어려워진다. 이번 경우처럼 구제역 차단에도 실패하고 커다란 경제적 부담마저 지게 된 것은 매뉴얼이 잘못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준비된 매뉴얼이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불거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구제역에 걸린 가축 중에 스스로 완치가 되는 경우도 있고, 그런 가축의 고기나 우유가 사람에게 크게 위험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구제역의 무차별적인 확산 위험과 소비자의 거부감을 무시할 수는 없다. 2000년의 경우에는 구제역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비자가 육류 소비를 포기해버려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되기도 했다. 구제역에 걸린 육류의 가공과 유통은 과학적 사실과 상관없이 소비자에게 더욱 심각한 거부감을 줄 것이 분명하다.


축산업의 규모가 커지고,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면서 가축의 사회적 인식이 크게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대규모 축산업이 낯설다는 이유로 육식을 거부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육식도 채식과 함께 인류의 엄연한 생존 방식 중 하나다. 생명의 존엄성은 당연한 것이지만 도를 넘어서면 문제가 된다. 현대 과학에서 생명은 가축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축업자들이 가축을 정말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한다는 인식도 위험한 것일 수 있다. 구제역은 우리에게 내려진 천형(天刑)이 아니라 우리가 현명하게 극복해야 하는 천재지변이다.


매뉴얼을 무시하고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매몰지의 문제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침출수가 퇴비로 쓸 수 있는 '유기물'이라는 전직 고위 관료의 황당한 주장에 현혹돼서는 절대 안 된다. 무책임한 엉터리 전문가를 앞세운 근거 없는 괴담도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확인된 기술을 총동원해서 더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와 국민 모두가 관심과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과도하게 확대되고 있는 우리나라 축산업의 총체적인 점검도 필요한 시점이다.






이덕환 서강대 과학커뮤니케이션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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