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연미 기자] 미국 정부에서 테러리스트 협상 자문을 맡았던 세계적인 협상 전문가 허브 코헨은 "협상이란 서로 다른 욕구와 이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양측의 필요를 충족시켜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세일 기간도 아닌데 정찰제 백화점에서 물건 값을 깎거나 VIP를 인질로 잡고 있는 테러범을 설득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세상 일은 크고 작은 협상의 다른 이름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지난해 열린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문화'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대화와 타협을 통한 협상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줬다. "선진국들에게 족집게 과외를 받은 셈"이라고 했던 한 고위 관료의 표현처럼 G20은 국제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선진국들의 노하우를 접수할 수 있는 호기였다. 더불어 협상에 서툰 우리의 현실을 절감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가 협상 과정을 두고 불거진 굴욕 협상 논란 역시 협상 기술을 키울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현장을 누빈 이들도 이런 속내를 털어놓는다. 금융위기 당시 한·미 통화 스와프(교환) 계약을 체결하고 G20 정상회의 유치를 이뤄낸 기획재정부 신제윤 국제업무관리관은 최근 "G20을 마치고 첫째 국력, 둘째 콘텐츠, 셋째 언어의 부족함을 절감했다"면서 "흔히 영어만 자유자재로 구사하면 협상장을 쥐락펴락 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협상 밑천(콘텐츠)의 문제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G20 당시 셰르파(교섭대표)로 나서 협상을 진두지휘한 G20 준비위 이창용 기획조정단장도 이 말에 동감했다. 그는 협상이 난항을 겪을 때 영국 셰르파가 귀띔했던 협상의 기술을 소개했다. 협상이 제자리 걸음을 하자 영국측 대표가 다가와 '잠깐 올라가 소그룹 협의를 하자'고 권했다던 후일담이다. 이 단장은 "내가 '소그룹 회의 시간이 길어질 것 같은데 기다리는 사람들을 해산하게 할까?'라고 물으니 그가 '창용, 그렇게하면 여기 소그룹 사람들이 압력을 안 받아서 협상 타결이 안돼. 기다리게 해.'라고 하더라"면서 "이런 노하우들은 의장국이 아니었으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국제 규범을 만드는 데에 참여했던 선진국들의 협상력을 실감했다는 증언이다.
사실 종전에 한국이 가지고 있던 협상의 기술은 고작해야 '얼굴 장사'였다. 자주 보면 신뢰가 쌓이고, 이 과정이 협상 을 부드럽게 이끄는 윤활유가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말은 익숙한 얼굴 한 둘에 기대어 목소리를 내는 데 만족해야 할만큼 한국의 협상력이 일천하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언어도 문제지만, 장전해 갈 콘텐츠도, 이걸 제대로 포장할 기술도 아직은 부족한 게 사실이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은 2일 "선진국으로 가자면 G20을 통해 얻고 깨달은 것들을 한국의 소프트 파워를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난 1990년부터 우루과이라운드와 한-EU협상 등 다수의 국제무대를 누빈 통상협상가다. 1994년에 시작돼 1997년 2월 타결된 WTO 기본통신협상에서는 우리측 협상 대표로 나서 '미스터 보이스(한국을 대표하는 목소리)'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최 원장은 "국제 무대에서는 콘텐츠 없이는 협상이 이뤄질 수 없다"며 "협상은 나와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파악, 공통 가치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지식을 외우게 하는 교육이나 목표 하달식 공직 문화에서 벗어나야 토론이 생활화된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연미 기자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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