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영무 부국장 겸 산업부장] 이달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현장. 오랫동안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사면 복권이후 첫 데뷔 무대. 그런데 전혀 예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두 딸과 손을 맞잡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이 전 회장이 등장한 것. 이 회장에게 집중될 언론의 포커스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딸들의 등장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 그것도 아버지가 마치 초등학생 딸아이 둘의 손을 잡은 것과 똑같은 상황. 단독 사면이니, IOC 활동이니, 평창 동계올림픽유치관련 등 송곳같이 쏟아질 질문 공세가 복병의 등장으로 정지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게 됐다.
이 전 회장은 취재진에게 "우리 딸들을 광고 해야겠다"면서 "아직은 내가 손을 잡고 다녀야하는 어린애"라며 특유의 화법을 썼다. 광고를 한다면서도 어린애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각 언론의 메인 면을 차지한 이 사진은 그 자체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른바 재벌가 딸들의 시대가 본격 개막됐으나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고 풀이된다.
이건희라는 인물은 과묵하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있다. 앞 뒤를 따져봐도 항상 모멘텀이 된다. 어설픈 한마디를 줍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미루어 짐작컨대 두 딸과 양손을 잡은 이 회장의 사진은 10년 후 우리 재계의 새로운 한 획을 여는 단초임이 분명할 것이다.
재계에 부는 '딸들의 반란'은 이미 범상치 않게 똬리를 틀어왔다. 반란이라해서 그들이 뒷전에서 뭔가를 도모한다는 게 아니다. 종전과 비교했을때 '재벌가 딸에 대한 인식이나 그들 스스로의 생각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에 반란이라는 개념을 쓴 것이다. 그동안에 재벌가 딸들은 온실 속의 화초 처럼 자랐기 때문에 경영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해왔다. 어렸을 때부터 후계자라는 생각보다는 흠집나지 않게끔 하는 소극적 학습이 주를 이뤘다. 그렇기 때문에 딸들 스스로도 우아한 삶을 지향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나마 손 대면 미술이나 패션, 광고, 호텔 등 소프트한 부문에만 한정됐다. 이른바 여성스러운 또는 여성의 섬세함이 요구되는 업종에 그친 셈이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확연히 달라졌다. 거침없이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구색 갖추기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을 거부한다. 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영에서 진검승부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이 글로벌 경쟁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여성의 힘이다. 박세리, 김연아, 장미란, 이소연 등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드높인 여성들의 파워는 그 기세가 파죽지세다. 국내에선 각 분야에서 이미 여성파워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고 있다. 신입사원 채용에서도 남성 지원자는 숫적인 측면에서 이득을 보는 꼴이다. 남녀 구분없이 뽑자면 80%를 여성이 차지한다는 게 대부분 인사관련자들의 촌평이다.
재벌가 딸들은 당연히 이러한 여성 파워의 선두주자임에 분명하다.
이미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 최은영 한진해운 홀딩스 회장, 보령그룹의 김은선 부회장, 대성그룹은 김수근 창업주의 장녀인 김영주 코리아닷컴 부회장, 2녀 김정주 대성닷컴 사장, 3녀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이 경영의 전면에서 활동중이다.
삼성가의 이부진ㆍ이서현 전무, 현대기아차그룹의 정성이 이노션 고문, 신세계그룹의 정유경 부사장, CJ E&M의 이미경 총괄부회장, 조현아 대한항공 전무, 현대그룹의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 애경그룹의 채은정 부사장 등도 뒤를 잇고 있다.
10년후 대한민국 재계 리더 가운데 여성을 찾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한 사항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재벌가 딸들은 아들과 경쟁하는 한쪽 어깨만 골몰할 때가 아니다. 또다른 한쪽 어깨는 임직원들과 소비자들에게 내주면서 시야를 넓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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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무 부국장 겸 산업부장 ymoo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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