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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태풍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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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만의 초대형 태풍 켓사나가 필리핀과 동남아 일대를 휩쓸며 수십만의 이재민과 수백명의 사망자를 냈다는 뉴스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얼마 되지도 않는 두달치 월급을 이재민 구호에 쓰라고 보탤 만큼 현장은 상상보다 눈물겹습니다.


흙탕물이 넘칠 듯이 찰랑찰랑한 다리 위에서, 나뭇잎으로 엮은 지붕위에 온 가족이 앉은 채 떠내려가는 수재민들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왜소하고 가련하기만 한 필리핀 국민들. 그들 일가족은 결코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닌데도 다리 위의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간간이 밧줄을 내려 구조하려 해도 워낙 거센 물길이라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건 바로 50년 전 추석 즈음에 사라호 태풍으로 한반도가 강타당할 때, 낙동강변 둑 위에서 속수무책으로 바라 봤던 우리의 참담한 광경과 너무나 똑 같았습니다.


품팔이로 돈을 벌겠다고 낯선 땅을 선택한 많은 필리핀 노동자들과 시집살이 중인 신혼의 필리피노들은 조국에 있는 가족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밤들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이제 웬만큼 잘 살게 된 대한민국 정부가 분명히 해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소위 ‘G20’ 금융정상회의를 개최하게 될 정도로 훌쩍 커버린 나라가 이웃나라의 재난에 물심양면으로 침묵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MB가 특별기자회견에서 선진국 진입의 계기로 하자고 강조한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국민의식’이 한 차원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정부의식’이 한 차원 높아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필리핀은 1950년 북한의 남침 당시 20대의 젊은이들에게 총을 들려서 한국에 파견했던 유엔 참전 16개국 중의 당당한 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의 국민들인 만큼 추석 연휴에 무료로 하루 10분정도씩이라도 조국의 가족들에게 국제전화로 안부전화를 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하는 것도 작은 위로가 될 텐데 말입니다.
추석에 뜬 보름달이 그들의 가슴에도 따뜻하게 머물 수 있도록···.


2003년 9월 태풍 매미가 남해안을 강타했을 때 경남 거제의 한 어촌은 통째로 해일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강풍에 실려 마을을 삼킨 파도 높이가 족히 20m가 넘었기에 주민들은 무조건 산 위로 올라가서 공포 속에 날이 밝기만 기다려야 했지요.


그날 파도가 해안을 엄습할 것이라는 긴급 대피방송에 모든 고깃배들은 선창으로 피신해 단단히 묶여지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세찬 비바람 속에서 배의 닻을 올리며 묶였던 밧줄을 풀고 키를 잡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경험에서 얻은 본능으로 산더미 같은 파도를 정면으로 맞으며 배를 몰고 대양으로 나갔습니다. 칠흑 같은 밤에 삼킬 듯이 덤벼드는 사나운 해일 위에서 10여시간을 그렇게 고독하게 싸웠다고 합니다. 이윽고 먼동이 트고 바람이 잦아질 때야 뱃머리를 마을로 돌렸습니다.


그런데 돌아 온 마을에는 남은 집 한 채도 없었으며 모든 배는 서로 엉켜서 육지 위에 가로누워 있었습니다. 살아서 개선장군처럼 배를 몰고 돌아오는 모습을 본 주민들의 감격이야 오죽 했겠습니까. 그는 낡은 배 한 척으로 폐허가 된 어촌에 희망과 용기를 주었지만 격랑 속에 배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었으면 성한 이가 한 개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북의 이산가족을 만나기 위해 신청해 둔 대기자 명단의 수가 무려 8만명. 하루에 100명씩 만난다고 해도 2년 이상을 내리 만나야 하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상봉 대기자의 35% 이상인 3만여명이 80세 이상으로 하루에 10명꼴로 세상을 뜨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태풍 속에서 온몸을 던져 희망의 메시지를 남긴 노인을 생각해서라도 우리 정부가 이런 고령 이산가족들의 하염없는 기다림에 한줄기 빛이 될 획기적인 대안을 내 놓아야만 합니다. 10년 전부터 제사를 지내왔던 북의 가족을 살아서 다시 만나는 나라가 어찌 선진국일까요.

시사평론가 김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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