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고속버스터미널에는 흑백영화에서 본듯한 고풍스러운 자동차 한대가 전시돼 있습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창업주인 고(故) 박인천 회장이 1946년 설립한 광주택시 출범 당시의 2대 중 한대의 모습입니다. 지방에서 택시 2대로 출발한 이 기업은 설립 60주년인 2006년 서울역 앞에 웅장하게 자리잡은 대우빌딩의 주인이 됩니다. 재계 서열도 10위권 안으로 단번에 진입했습니다. 택시에서 시작해 고속버스를 거쳐 항공운수(아시아나항공)까지 발을 넓히더니 급기야 서울의 심장부에 깃발을 꽂은 것입니다. 인수당시 대우건설은 국내 건설업계 1위 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성공스토리는 3년만에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족쇄가 돼 버렸습니다. 금호측 입장에선 워낙 덩치가 큰 회사를 인수하다보니 혼자서 다 떠안지 못하고 기관투자가들과 손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금호측은 당시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우건설 지분 72%를 사면서 39%의 물량을 미래에셋파트너스 등 18개 기관투자자들로부터 지원받았습니다. 금액으로는 3조5000억원어치입니다. 그룹 계열사측이 인수한 물량은 금호산업(18.6%)를 비롯한 그룹계열사들이 32.5%에 불과했습니다.
세상에는 공짜 점심이 없듯이 금호측은 인수를 도와준 기관들에게 지키기 힘든 약속을 했습니다. 2009년 연말까지 대우건설이 3만1500원이 되지 않으면 2010년 6월까지 차액을 메워주겠단 약속을 한 것입니다. 3년전 인수가격은 주당 2만6262원이었습니다. 사실상 4년간의 투자에 대해 최소 이자를 물어주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문제는 잘 나갈 줄 믿었던 대우건설 주가가 금융위기로 3만원대는 커녕 1만원대 초반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금호측이 기관들에게 3만1500원에 대우건설 주식을 되사주려면 4조원 가량의 자금이 소요됩니다. 가뜩이나 유동성 얘기가 끊이지 않는 금호측으로선 이 약속을 이행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고래를 삼켰다 3년만에 다시 토해내겠다고 항복선언한 이유입니다.
◆ 대우건설 기업가치에 도움, 증권가 환영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선 뼈아픈 일이지만 대우건설 일반주주들에게 금호측의 용단은 만세를 부를 일인 듯 합니다. 일요일 들린 이 소식에 증권사 건설담당 애널리스트들은 일제히 긍정적 리포트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기업가치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앞다퉈 목표가를 올렸습니다. 삼성증권은 투자의견을 '보유'에서 '매수'로 올리며 목표가를 1만7200원으로 34% 높였습니다. 금호측으로부터 계열분리되면 산업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의 타이트한 관리를 받으며 재무구조 등에 더 유리할 것이라고 합니다.
대신증권은 1만4000원이던 목표가를 1만5800원으로 올렸습니다. 특히 의지와 무관하게 인수했던 대한통운 지분을 매각할 수 있게 되면서 차입금 규모를 줄일 수 있는 등 그룹 리스크 축소에 무게를 뒀습니다. 하나대투증권과 NH투자증권은 당장 목표가를 올리진 않았지만 이번 결정이 대우건설 주가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표가를 올릴수도 있다고 합니다.
◆ 3년만의 재매각 금호측은 '우울'
야심차게 추진한 국내 1위 건설업체 인수가 3년만에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금호아시아나그룹측 계열 상장사들에 대한 전망은 때마침 올라온 장마전선처럼 어두운 분위기입니다. 대우건설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금호산업은 당장 지분매각에 대한 손실이 불가피하다. 금호산업의 경우, 2006년 대우건설에 투자한 돈 1조6300억원이 3년여만에 반토막날 처지에 몰렸습니다.
금호타이어(5.6%) 금호석유화학(4.5%) 아시아나항공(2.8%)등 그룹의 주요 상장계열사들은 대부분 대우건설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까진 평가손이었지만 매각할 경우 손실이 현실화됩니다.
대우건설이 2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대한통운도 마찬가지. 금호측과 관계가 없어지는 대우건설이 지분매각에 나선다면 대한통운의 주가하락은 불가피합니다. 이렇게 되면 대한통운 지분 24%를 보유하고 있는 아시아나항공까지 평가손을 보게 됩다. 이는 다시 아시아나항공 지분 33.5%를 보유하고 있는 금호산업의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전필수 기자 phils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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