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지기자
2022년 말 발생한 전세사기 사태로 법원 경매에 쏟아진 피해 빌라(다세대·연립주택)들이 특정 법인에 무더기로 넘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이 법인들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 정부가 낙찰자에게 받아야 할 돈을 회수하는 데 소홀한 틈을 타 수십 채를 낙찰받았다. 전세사기 사태가 벌어진 지 2년여 만에 새로운 형태의 ‘빌라왕’이 등장한 것이다. 특히 이들은 낙찰받은 피해 주택에 새로운 세입자를 들였다. 임대보증금은 또 다른 주택을 낙찰받는 데 사용해 과거 전세사기의 발단이 된 전형적인 ‘무자본 갭투자’ 행태를 답습했다.
전문가들은 이미 2만명이 넘는 피해자를 낳은 전세사기 사태가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정부가 보증금 회수를 위해 재경매에 나설 경우 새 임차인은 보증금을 날리거나 살던 집에서 대책 없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상황 파악은커녕 문제의식조차 없어 오히려 빌라왕 양산에 일조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아시아경제는 지난 5월부터 약 4개월간 부동산 경매 전문 사이트 ‘지지옥션’을 통해 2022년부터 지난달까지 경매가 진행된 수도권 소재 빌라 중 낙찰가율(감정가 대비 낙찰가)이 30% 이내인 물건을 전수분석했다. 이어 전세사기 피해 경매 물건들을 추적한 결과, 수십 채에 달하는 빌라를 낙찰받은 소수의 법인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 중 전세사기 주택을 가장 많이 사들인 건 S법인이었다. 지난해 5월(매각기일 기준)부터 올해 7월까지 1년여 사이 전세사기 피해 빌라 총 49채를 낙찰받았다. 서울 강서·금천구, 경기 수원·부천시, 인천 미추홀·서구 등 전세사기 피해 지역에서 골고루 확보했다. L법인도 지난해 9월 서울 구로구 개봉동 빌라를 시작으로 올해 3월까지 인천 미추홀·부평구, 경기 부천시, 서울 강서·양천구 등에서 총 31채를 쓸어 담았다. H법인은 올해 1~3월 총 30채를 집중적으로 낙찰받았다. K·J법인도 경매를 통해 각각 20채 가까이 확보했다. 이런 법인이 수도권에서만 44개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세사기 여파로 2022년부터 지난달까지 수도권에서는 최소 9000채 이상의 피해 빌라가 경매로 나왔다. HUG와 같은 주택보증기관들은 집주인이 돌려주지 못한 전세보증금을 임차인(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가입자)에게 대신 돌려준 뒤 피해 주택을 경매에 넘겨 전세금을 회수한다. 이런 주택을 낙찰받으면 낙찰대금과 별도로 HUG가 피해자에 지원한 보증금(대위변제금)을 HUG에 되돌려줘야 한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 전세사기 피해 빌라는 경매에서 여러 번 유찰돼 낙찰가격이 감정가의 10% 이내로 내려가는 등 헐값이 된다.
빌라왕들은 HUG가 보증금 회수에 미온적이라는 점을 활용해 돈을 갚지 않고 수십 채를 사들일 수 있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김은혜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HUG가 2022년부터 2024년 9월까지 경매 신청한 물건(8929건) 중 보증금을 전액 회수한 물건은 547건(약 6%)에 그쳤다. 이 기간 회수한 누적 보증금은 전체(1조9029억원)의 약 37%(7086억원) 수준이다. L법인 대표는 통화에서 "HUG에서 구상권을 청구하는데 응하지 않고 있다"며 "(보증금 상환에) 기한이 없다"고 말했다.
빌라왕들은 이렇게 확보한 빌라 수십 채를 다시 임대했다. 아시아경제는 지난 7~8월 경기 부천시와 서울 강서구 일대 빌라 30여곳에 우편물을 송달하고 현장 취재한 결과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L법인 대표는 "HUG가 경매에 내놓은 빌라를 500만원 정도 주고 낙찰받아 보증금 500만원·월세 30만원에 세를 놨다"고 말했다. 지난해와 올해 S법인과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는 세입자들도 발견됐다.
특히 빌라왕들은 낙찰가 수준의 임대보증금을 받고 세입자를 들였다. 이 보증금은 다시 다른 주택을 낙찰받는 자금으로 활용됐다. 전세사기 사태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이익을 거둔 것이다. L법인은 감정가 1억5000만원짜리 빌라(인천 부평구 부개동)를 226만원에, 3억원짜리(부천시 소사구 소사본동)를 905만원에 사들여 한 채 당 보증금 300만~500만원, 월세 30만~50만원을 받았다. S법인은 감정가 2억7200만원 빌라(부천시 원미구 심곡동)를 1124만원에 매수해 보증금 1000만원, 월세 70만원을 받았다. 감정가 2억3300만원짜리 신축 빌라(부천시 원미구 심곡동)는 483만원에 가져간 뒤, 보증금 1500만원, 월세 60만원에 내놨다.
L법인과 S법인은 빙산의 일각일 뿐 드러나지 않은 재임대 사례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천시 원미구에서 만난 S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전세사기 피해 주택을 낙찰받은 사람들은 매수한 빌라를 다시 월세로 내놔 다달이 돈을 벌거나, 낙찰가보다 높은 가격에 팔아 시세 차익을 얻는다"고 전했다.
김천일 강남대 부동산건설학부 교수는 "과거 무자본 갭투자로 빌라 수백 채씩 사들인 것이 전세사기의 발단이 됐는데 경매 시장에서 또다시 유사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면서 "낙찰가율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전세사기 피해 주택 경매에는 항상 이런 제3의 경매꾼들이 끼어들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HUG가 보증금 회수에 나선다면 새로운 세입자들은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이 된다. 통상 전세사기 피해 주택에는 앞선 피해자들이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임차권 등기'를 설정해둔다. 이는 피해 주택 낙찰자가 HUG에 보증금을 전액 상환해야 소멸한다. 낙찰자가 제대로 상환하지 않을 경우 해당 주택은 다시 경매에 넘어갈 수 있다. 새로운 낙찰자가 생기면 현 세입자 입장에서는 집주인이 바뀌는 셈이다. 부천 심곡동에서 만난 S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세입자가 사는 상태에서 경매가 진행돼 낙찰자가 생겼을 때 현재 사는 임차인은 방을 빼줘야 할 수도 있다"며 "임차권 등기가 있는 주택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HUG는 재임대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HUG 관계자는 "낙찰자가 HUG에 보증금을 상환하지 않으면 소유권을 가질 수 없으므로 재임대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낙찰이 되면 거의 다 보증금을 받고 있고, 낙찰자는 상환을 회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정경국 법무사(대한법무사협회 전세피해지원 공익법무사단장)는 "낙찰자가 경락 물건을 제3자에게 팔거나 다시 경매하려고 하면 등기를 해야 하지만 임대차 계약을 맺을 경우에는 등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