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진법조전문기자
계좌를 양도할 목적으로 유령회사를 만들어 법인 명의 계좌를 개설했더라도 서류 위조 등 신청인의 적극적인 기망 행위가 없었던 상황에서 은행 직원의 부실한 심사로 인해 계좌가 발급됐다면 업무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신청인이 제출한 서류 등이 허위일 가능성을 전제로 직원이 충분한 심사를 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계좌 개설 업무가 방해됐는지를 판단해온 기존 대법원 입장을 재확인한 판결이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업무방해,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횡령 등 혐의로 기소된 윤모씨(26)의 상고심에서 윤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법인 명의 계좌가 개설된 것은 피해 금융기관 업무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으로 볼 여지가 많아 계좌 개설 신청인인 피고인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없으므로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럼에도 이 부분 공소사실을 유죄라고 본 원심의 판단에는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한 채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의 성립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윤씨는 2022년 5월 모르는 이로부터 "계좌를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제안을 받은 뒤 실체가 없는 회사를 설립하고 회사 명의 계좌를 타인에게 양도해 은행의 업무를 방해하고 전자금융거래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같은 해 7월 계좌로 입금된 400만원을 임의로 사용해 횡령한 혐의도 받았다.
1심과 2심은 윤씨의 혐의를 전부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윤씨에게 업무방해죄가 성립할 수 없다고 보고 업무방해죄 무죄 취지로 2심 판결을 파기했다.
대법원은 계좌 개설 신청인이 금융거래 목적 등을 허위로 제출하더라도 이를 은행 직원이 철저히 검증하지 않았다면 위계로 은행의 업무를 방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원래 제출받은 서류가 허위일 수 있음을 전제로 자격을 심사하는 업무라는 점을 고려한 판단이다.
앞서 대법원은 2004년 "상대방으로부터 신청을 받아 일정한 자격요건 등을 갖춘 경우에 한해 그에 대한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업무에 관해서는 신청서에 기재된 사유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하여 자격요건 등을 심사·판단하는 것이므로, 업무담당자가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지 아니한 채 신청인이 제출한 허위 신청사유나 허위 소명자료를 가볍게 믿고 수용했다면 이는 업무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으로서 신청인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없어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또 대법원은 지난해 이번 사건처럼 법인 명의 계좌 개설이 문제 된 사안에서 "계좌 개설 신청인이 접근매체를 양도할 의사로 금융기관에 법인 명의 계좌를 개설하면서 예금거래신청서 등에 금융거래의 목적이나 접근매체의 양도의사 유무 등에 관한 사실을 허위로 기재했으나, 계좌 개설 심사 업무를 담당하는 금융기관의 업무담당자가 단순히 예금거래신청서 등에 기재된 계좌개설 신청인의 허위 답변만을 그대로 믿고 그 내용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증빙자료의 요구 등 추가적인 확인조치 없이 법인 명의의 계좌를 개설해 준 경우 그 계좌 개설은 금융기관 업무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이므로, 계좌 개설 신청인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없어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이번 사건에서 재판부는 "피고인은 법인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금융기관이 미리 마련한 양식인 예금거래신청서를 제출하고, 통장, 현금카드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경우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할 수 있고 전자금융거래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설명사항에 '설명들었음'이라고 표시하는 등 소극적인 행위만을 했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피고인이 법인 명의의 계좌개설을 신청하면서 제출한 관련 서류들은, 계좌 명의자인 회사의 사업사실 등록을 증명하거나 회사가 상법 등 관련 법령에 따라 성립돼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한 사업자등록증, 법인인감증명서, 법인등기사항전부증명서 등 뿐이었다"라며 "이들 서류 외에 피해 금융기관의 업무담당자가 피고인에게 금융거래 목적 등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추가적인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거나 이를 확인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사안과 관련 재판부는 "피고인이 법인 명의 계좌를 개설하면서 작성한 계좌개설신청서는 내용의 진실성이 담보되는 서류라고 볼 수 없고, 제출된 관련 서류들도 법인 명의 계좌 개설 시 기본적으로 구비해야 할 서류들로 보일 뿐, 계좌 명의자인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거나 정상적으로 운영될 것이라는 등의 진실한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고 밝혔다.
이어 "이와 관련 계좌 개설 심사 업무를 담당하는 금융기관의 업무담당자가 예금거래신청서 등에 기재된 금융거래 목적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추가로 그에 관한 객관적 자료의 제출을 요구하는 등 적절한 심사절차를 진행했음에도 피고인이 그에 관해 허위 서류를 작성하거나 문서를 위조해 제출함으로써 업무담당자가 허위임을 발견하지 못해 법인 명의의 계좌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은 찾아보기 어렵다"며 업무방해죄 성립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