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 마냥 웃을 수만 없는 '전투식량 해프닝'

입대해서 처음으로 전투식량을 먹은 곳은 기차 안이었다.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위해 기차를 탔는데, 장소 특성상 배식이 쉽지 않아 군에서는 점심 대신 전투식량을 나눠줬다. 정확하게 어떤 전투식량을 먹었는지는 잘 기억 나지 않는다. 하지만 레토르트에 들어 있었으니 아마 ‘1형’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데우지도 않은 전투식량이었지만,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아 놀라웠다. 하지만 생애 첫 전투식량만큼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차 내 이등병 인솔을 담당하는 국군 철도수송지원반(TMO) 장병들 태도였다. 기차라 점심을 배식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전투식량을 나눠 주는 것이라고 객차를 돌아다니며 계속 알렸기 때문이다. ‘식사 배식을 못 받는 것이 그렇게 큰일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은 이 사실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사실 군에서 배식은 TMO 장병들이 몇 번이나 강조할 만큼 중요한 것이다. 군에서는 식사도 명령이다. 잘 먹어야 전투력을 잘 유지할 수 있고, 전투를 위한 보급망을 평상시 점검할 수 있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결식은 경우에 따라 군법에 의해 처벌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 군은 식사에 엄청난 신경을 쓴다. 벌써 전역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 시절에도 전투식량을 평상시에 먹을 일은 별로 없었다. 전역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야외 훈련 때도 군에서는 밥차를 이용한 ‘식사 추진’으로 일반식을 보급한다. 야외 생활이 장기간 지속될 것이 예상되면, 아예 차량형 취사장을 가져와 조리와 배식을 진행한다. 태풍으로 부대가 고립됐을 때 상급 부대가 가장 고민한 것이 부식 추진이었을 만큼 우리 군은 ‘밥’에 진심이다.

추석 연휴 기간 윤석열 대통령의 전투식량 기사를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윤 대통령은 추석인 17일 육군 15사단을 방문해 "잘 먹어야 훈련도 잘하고, 전투력도 생기는 법"이라며 "격오지에 있는 부대들에 대해서는 통조림이나 전투식량 등을 충분히 보급하라"고 지시했다 한다. 통조림의 기원은 나폴레옹이 전투식량을 만들려고 한 것에서 시작된다. 결국 통조림도 전투식량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전투식량을 장병들이 평상시에도 먹는 것이라 착각하는 것 같다.

대통령이 장병들의 편의를 위해 전투식량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번 ‘전투식량 해프닝’을 보고 있자면 현 정부의 정책 판단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또 군을 잘 모르는 대통령이 이런 결정을 내리는데 주변에서 만류하는 참모가 없었는지도 궁금하다. 국민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정책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렇다. 이공계 예산 삭감, 만 5세 입학, 수능 킬러문항 삭제, 69시간 근무제 등등이 그렇다. 최근 논란이 되는 의대 증원의 경우 정부는 매년 2000명을 증원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세금 문제도 있다.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니 부처 공무원들은 따라야 한다. 결국 전투식량 보급은 대폭 늘어날 것이다. 다 세금이 들어가는 일이다.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최악의 경우 다른 곳에 들어가야 할 예산이 갹출돼 전투식량 구입에 사용되어야 할 수 있다. 이 경우 장병들의 복지가 그만큼 줄어들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여기에 장병들은 재고 소진을 위해 일반 식사 대신 열악한 전투식량을 더 먹어야 할 판이다. 실소를 부른 ‘전투식량 해프닝’을 그냥 웃어넘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콘텐츠편집1팀 성기호 기자 kihoyeyo@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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